언어와 문화와 역사와 신화
말레이시아는 연방국이다. 바로 이웃의 인도네시아는 만 팔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두 나라 모두 다수 민족은 말레이 인이지만, 말레이 인 중에도 여러 민족이 있다. 하물며 바다로 갈라진 여러 섬은 언어와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에만도 7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고로, 현재 이 두 나라의 공식 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공용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어(바하사 말레이시아)라고 부르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바하사 인도네시아)라고 부르는데, 문법이 같고 어휘가 70퍼센트 가까이 겹친다. 문자 표기는 로마 알파벳을 빌려와서 쓴다. 사실상 서로 방언 정도라고 퉁칠 수 있는, 같은 언어다.
5주에 달하는 여행 기간 중 4주를 인도네시아에 할애하기로 했기 때문에, 둘 중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선택해서 좀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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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어를 혼자 들여다볼 때 어떤 책을 보면 좋을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조사를 한 선배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문자로 온 책 제목은 [EBS 입에서 톡 인도네시아어]. 여행용이라기보다는 인도네시아에 가서 살 사람에게 맞춰진 책이다. 자꾸만 '되어지다' 표현이 나오는 걸 제외하면 좋은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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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 공부 중에 요일을 봤다.
<인도네시아 요일>
일요일 - hari Minggu / 또는 hari Ahad (발음은 거의 그대로, 하리 밍구, 하리 아하드)
월요일 - hari Senin (하리 스닌)
화요일 - hari Selasa (하리 슬라사)
수요일 - hari Rabu / 또는 hari Rebo (하리 라부, 하리 르보)
목요일 - hari Kamis (하리 까미스)
금요일 - hari Jumat / 또는 hari Jemuwah (하리 주마뜨, 하리 즈무와)
토요일 - hari Sabtu / 또는 hari Setu (하리 삽뚜, 하리 스뚜)
바로 짐작이 가겠지만 hari는 '날'을 뜻한다. 적어놓고, 각 요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 좀 더 외워질까 싶어서 단어를 따로 찾아봤다.
이 단어들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오직 요일만 가리킨다.
이건 좀 이상하다. 한국어에서 월화수목금토일은 달과 태양과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 불과 물과 나무와 금속과 흙으로 오행과 천문을 담고 있다. 영어의 요일 이름 역시 태양의 날 Sunday, 달의 날 Monday에 북유럽 신화의 군신 티르의 날 Tuesday, 오딘의 날 Wednesday, 토르의 날 Thursday, 프레야의 날 Friday, 로마의 농경신에서 따온 Saturday까지 천문과 신화가 담겨 있다. 많은 나라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요일명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설마.
인도네시아 사전에는 나오는 게 없다. 그렇다면, 어원을 검색해보았다. 한국어 검색으로는 나오는 게 없어서 영어로 추적.
알고 보니 이 단어는 모두 아랍어 요일명에서 따와서 만든 말이었다. 아랍어로 적으면 읽을 수가 없으니 부정확하나마 발음만 옮겨본다. 일요일이 알 아하드, 월요일은 알 이쓰나인... Al을 생략하고 열거하면 화요일은 술라싸이, 수요일은 알 아르바이, 목요일은 카미쓰, 금요일은 주므아, 토요일은 싸브트. 아랍어의 발음만 가져와서, 로마자로 새로 표기한 거다.
그렇다면 아랍어로 이 요일명은 무슨 의미인가? 다시 찾아봤다.
아랍의 요일명은 매우 단순하다. 알 아하드의 의미는 '첫째 날', 알 이스나인은 '둘째 날', 알 술라싸이는 '셋째 날'... 아하. 천지창조로군. 이슬람의 바탕에 실로 충실한 작명법이로다.
(** 참고로 이렇게 세어나가면 우리의 토요일이 '일곱째 날'이다. 그러나 아랍 문화권의 휴일은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여섯째 날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기에 합동 예배를 드리느라 일을 쉬는 날이라 한다.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토요일에 쉬는 문화권은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양국 모두 이슬람이 다수 종교인 데다 받아들인 지도 오래 됐으니 수긍이 간다. 아참, 그냥 묶어서 말해버렸는데 말레이시아어는 표기가 또 다르다. 하지만 아래 보다시피 어원이 같다는 점은 금방 알 수 있고, 표기만 조금 다를 뿐 발음도 같다.
<말레이시아 요일>
일요일 - ahad, 월요일 - isnin, 화요일 - Selesa, 수요일 - Rabu, 목요일 - Khamis, 금요일 - Jumaat, 토요일 - Sab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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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예외가 있다. 맨 위에 나온 일요일의 다른 이름 Minggu. 이 단어만큼은 이슬람과 관계가 없다. 포르투갈어의 일요일 Domingo에서 왔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일대에 처음 들어간 유럽 상인들이 포르투갈이었고, 이후 몇 백 년간 이 지역에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분쟁이 있었다는 역사의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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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제일 큰 섬인 자바섬은 인도네시아어도 쓰지만 원래의 자바어도 쓴다. 자바어의 요일명은 공용어와는 또 전혀 다르다. 자바섬의 원래 문화는 과거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양음력을 사용하고, 7개 요일이 아니라 5개 요일을 썼다고 한다.
각 요일은 Legi, Pahing, Pon, Wage, Kliwon인데 각각 백색-동쪽, 적색-남쪽, 황색-서쪽, 흑색-북쪽, 모호한 색깔-중앙을 의미한다고 하니, 화수목금토만 아니다 뿐이지 오행의 나머지 이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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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흥미가 동해서 여기까지 어원을 파봤지만, 여행 중에 요일을 입에 올릴 일은 없었다. 숫자만 실컷 써먹었다.
아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요일명을 아랍에서 가져왔다고는 해도, 이 두 나라는 일요일에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