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토크의 달인이 됩니다.
호주 로컬 카페에서 일하면 단골손님들과 자연스레 안면을 트게 된다. 단골들은 대체로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겨울이든 여름이든 같은 커피만 시키기 때문에 이름과 커피를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가 없다. 혹시 누군가 평소 오던 시간에 오지 않는다면 어디가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대게 다음날 같은 시간에 다시 나타나지만 혹시 다음날도 오지 않는다? 여행이나 출장을 간 게 아니면 그건 정말 큰일이 생긴 거다.
최근 2년 사이엔 코로나에 걸려서 일주일씩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격리가 끝나고 돌아와서는 아직 후유증이 남은 듯 쉰 목소리로, 생각보다 많이 아팠는데 커피 못 마시는 게 더 힘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호주인들의 커피 사랑은 진심인 듯하다.
로컬 카페는 주민들의 카페인 충전소이기도 하지만, 사실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주로 같은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손님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혼자 커피를 마시러 왔다가도 아는 사람이 보이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한 명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과 합석을 하기도 한다. 일면식이 없는 사이더라도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직원들도 종종 합류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수다의 장이 열린다.
손님들은 바리스타에게도 말을 많이 건다. 반대로 바리스타도 손님들에게 말을 많이 한다. 중심가에 있는 카페는 워낙 바쁘고 단골보다는 왔다 갔다 하는 손님들이 많아서 덜하지만 로컬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 손님들과 수다 떠는 것도 업무 중의 하나라고 본다. 나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인데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스몰토크의 달인이 되었다. MBTI 확신의 I인데 처음 본 사람들은 내가 E라고 오해하고들 한다. 직업병이다.
아무튼 업무 환경이 그렇다 보니 직원과 단골손님들은 매일 아침 서로 일상을 묻고 답하고, 자연스레 온갖 대소사를 공유하게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해 주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위로해 준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거나 아파도 호주 사람들은 직장에서는 크게 티를 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카페에 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터뜨리는 걸 종종 보았다. 개인적인 감정을 공적인 자리에서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호주 사람들이지만 동네 카페에서만은 대나무숲처럼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터놓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 알고 지낸 손님들과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도 서로 챙긴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손님들이 선물한 초콜릿으로 가게 냉장고 한 칸이 가득 차기도 한다. 1년 동안 천천히 다 먹어치우고 나면 다시 크리스마스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고 관심도 없던 손님들도 나와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나면 내가 온 나라와 내가 쓰는 언어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한국어로 Thank you를 어떻게 말하는지 묻고, 안 되는 발음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쓰려고 노력한다. 나는 영어 이름을 짓지 않고 이름 두 글자 중 끝글자만 쓰고 있는데 친해진 손님들은 성을 포함한 풀네임을 물어보기도 한다. 나도 그들의 그렇게 풀네임을 묻는다.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까지 미들 네임에 넣는 게 보편적이라 이름 읽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진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간다.
보통 한자리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경찰, 변호사, 요리사, 선생님, 운동선수, 맥주 브루어리 직원, 화장품 판매원, 버스기사, 우버이츠 배달원, 재택근무 중인 개발자, 학생, 작가, 주의원, 간호사, 건축가, 수의사, 배관공, 기자, 화가 등등 각양각색의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커피머신 앞에 서서 내가 가보지 못한 도시를 여행하고, 해보지 못한 직업을 체험하고, 살아보지 못한 삶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 한국에 몇 년 만에 다녀왔을 때 모든 게 질서 정연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모습에 감탄했지만, 딱 하나 나를 씁쓸하게 한 건 무인카페와 키오스크들이었다. 호주도 아직 무인카페는 못 봤지만 키오스크는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나는 호주에 와서 어쩌다 보니 바리스타가 되었고 오롯이 커피가 좋아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결국 내가 이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건 사람이었다. 물론 서비스 업종이다 보니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일도 종종 있지만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도 사람이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 세상은 참 빠르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런데 우리, 카페인이 절실하게 필요한 건 맞지만 정말 그거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