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오른 수학 과외와 방과 후 영어 수업의 기억
투썸플레이스 서대문홍은점에 가면 과외 수업에 한창인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인근에 충암초등학교부터 명지전문대학교까지 밀집해 있는 환경임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대개 대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중고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친다. 테이블을 붙여 나란히 앉아 열정적인 설명과 막간을 이용한 잡담, 냉정한 문제 풀이의 시간을 이어간다. 저번에 한 번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로부터 영어 수업을 받는 걸 본 적이 있다. 회화 수업인가 싶었는데 틈틈이 내가 학창시절 때 배웠던 문법 내용이 들려오는 걸로 보면 토익이나 토플 따위의 어학시험 대비 수업이었던 듯 하다.
나도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딱 한 번. 수학을 배웠다. 아무리 공부해도 당최 성적이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던 웬수 같은 과목이었다. 선생님은 초딩 때부터 줄곧 같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 O의 둘째 누나였다. 이름은 까먹었다. 전주교대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우리집으로 와서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주셨다. 새삼 죄송하다. 그래도 그렇지 일대일로 수업하는데 바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는 개싸가지가 어딨냔 말이다.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 착한 선생님조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물론 혼을 낸다거나 기분 나쁘게 조롱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최대한 점잖게 타이르며 교육자의 품위를 끝내 잃지 않으신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과외 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유감스럽지만 수학 성적은 제자리였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운다고 다 좋은 선생님으로 자라는 건 아니다. 나는 형편없는 (임시) 선생님이었다. 애초에 교육자가 될 마음 같은 건 없었지만 스무 살 여름, 운 좋게 삼성 드림클래스 활동을 시작한 나는 졸지에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아주 기초적인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하루에 2시간, 일주일에 두 번. 그렇게 일해서 매달 받아가는 돈이 60만원이었다. 시급이 무려 37,500원이었으니 그때도 지금도 이런 꿀 오브 꿀 아르바이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력과 인성 둘 다 그렇다. 영어 전공도 아니고, 외국에서 살다 와서 프리 토킹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과외나 학원 강사 짬이 쌓인 것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 어려운 내용 아니라고 수업 준비도 별로 안 해 가서 대충 무난하게 시간만 채웠으니, 그때도 지금도 이런 꿀벌 오브 꿀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화를 내기도 했다. 드럽게 말 안 듣는 꼬맹이 하나가 있었는데, 어쩜 한 번을 안 빼놓고 깝치길래 참다 참다 정색하며 혼을 좀 냈다. 평소랑은 다른 공기를 감지한 꼬맹이는 기분이 퍽 상했는지 그대로 뒤돌아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순간 내가 청춘학원물의 주인공, 아니 주인공이 미워하는 꼰대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었으나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똥 씹은 표정으로 얼레벌레 수업을 이어갔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얼굴만 기억나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꼬맹이는 열네 살이었을 테니 지금은 대학교를 다니거나 군 복무 중이거나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해 밥벌이에 한창일 것이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포용력 있는 좋은 어른 곁에서.
스무 살에 했던 첫 아르바이트이자 돈 받고 누군가를 가르친 유일한 경험의 배경이 되어준 곳은 충암중학교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어 새롭게 둥지를 튼 전셋집 바로 뒤에 있는 학교도 충암중학교다. 2013년 여름에는 낡고 구석진데 학교랑 집에서 멀기까지 한 서울 같지도 않은 곳으로 일터를 배정받은 사실에 한탄했고, 2023년 여름에는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귀엽고 한적한 동네에 한시적으로나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는 중이다.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변한 것은 나일까 응암동일까?
어쨌거나 스무 살의 삶과 서른 살의 삶 모두에게 애틋한 마음을 보낸다. 하루 하루가 크고 작은 챌린지의 연속이었던 2013년으로부터 딱 열 발자국 떨어져 '그땐 그랬지' 하며 웃는 추억팔이야말로 지금 내 삶이 괜찮다는 증거다. 하루 하루가 더 크고 작은 투쟁의 연속인 2023년 역시 다섯 발자국 열 발자국 떨어져서 들여다 볼 날이 올 거라 믿으니까. ‘거기까지 또 어떻게 간담’ 같은 생각은 안 한다.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다. 살던 대로 계속 살아도 말이다. 다만 내 가슴팍에도 못 미치던 꼬맹이한테 정색하고 혼꾸녕을 내던 시절보다는 열심히 살고 싶다. 솔직히 그 정도 책임감은 가져야 할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