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현 Aug 01. 2023

버디버디 아이디와 정현쿤의 욕망

데빌 키스와 스카이브레인과 깡다구 no.1 



*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내 이야기는 사실, 남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 반반.



P가 메시지를 보냈다. P는 나의 첫 직장 동료다. MD라는 역할에 걸맞게 뭐(M)든 다(D)하며 매 순간 바빴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제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한단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포트폴리오를 정리 중인데, 일전에 진행했던 모 행사 현장 사진을 갖고 있냐며 공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염치없이 이렇게 연락해서 죄송하다지만 다들 그러고 산다. 다행히 사진은 드라이브에 잘 저장해 뒀다. 내일까지 메일로 보내준다고 했다. 문제는 그의 메일 주소다.



devilkiss0842@naver.com



데빌 키스라 … 어쩌면 그는 한때 악마라는 존재에 매혹됐던 것일까? 혹은 열렬히 흠모하던 그녀가 악마처럼 치명적이었나? 둘 다 아니라면 데스 메탈 신봉자였던 사춘기 시절의 P군이 수십 개의 밴드 이름을 두고서 3일 밤낮을 새워가며 어렵게 선택한 아이디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그는 지금 이 아이디가 부끄럽다. ‘애정하는 메일인데 바꾸기 싫었다’는 물어보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까지 덧붙인 걸 보면. 어쨌든 부끄러움보다는 귀찮음이 컸던 P 덕분에 나는 새삼 나의 귀염뽀짝한 아이디 여럿을 떠올려 본다. 





여기서 아이디라 함은 버디버디 아이디를 가리킨다. 다음과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사이트 아이디는 지금까지 쭉 하나만 썼으니까. 나와 형의 이니셜을 갖다 붙인 다소 심심한 조합이다. 원래 내 이름만 따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누가 선점한 지 오래였다. 버디버디는 얘기가 다르다. 사실상 아이디를 뭐라 지을지 고민하려고 가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버디버디는 온갖 허세와 드립과 결기가 난무하는 흡사 천하제일아이디대회 서비스였다. 한글 사용이 가능했다는 게 차별화 포인트라면 포인트일 테다. 나 역시 아이디 하나 지을 때 며칠간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난다. 떡잎부터 허세와 관심병으로 점철돼 있던 김정현 군의 아이디 변천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스카이브레인  >  깡다구 no.1  >  블루스타v  >  아벨란체 

(참고로 ‘깡다구 no.1’은 이리성결교회 서재균 형님의 아이디를 특수문자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갖다 썼다. 이제야 사죄드린다.)



나는 버디버디 아이디가 당시의 내 욕망을 투영한다고 본다. 정확히 어떤 욕망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적 허영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나머지 나의 알량한 지성을 사방에 뽐내고 싶어 '하늘두뇌'라는 심오한 이름을 붙인 것일까? 학급과 학년을 넘어 익산 시내에서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을, 색깔 중에서 가장 간지 난다고 생각했던 블루와 조합해 거기에 승리의 v자까지 붙였던 건가. 답은 오직 초중딩 정현쿤만 알고 있을 테다. 어떻게든 더 있어 보이고 싶은 조급한 심정만이 거기 가득했다고 나는 짐작할 뿐이다. 아벨란체(avelanche)가 ‘눈사태’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것도 모른 채, TV에서 본 어느 프로게이머의 아이디에 매료돼 잘만 쓰고 있던 내 아이디를 바꿨을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래도 포털창에 버디버디 아이디를 검색하면 차마 소리 내 말하기도 어려운 주옥같은 리스트가 쏟아지는 걸 보니 그 시절 우리는 다 거기서 거기였던 것 같아 위안이 된다. 참고로 가수 지코의 초딩 시절 아이디는 ‘스릴미친키스’였다. 형은 진짜 달라도 뭐가 달라 …



 MBC 라디오스타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amormomento에서 autre.histoire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kimjeonghyeon_로 유지 중이다. 뜬금없이 순간(momento)을 사랑하라(amor)고 열변을 토하더니,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autre) 이야기(histoire)를 가진 존재라며 옘병을 떨다가, 어느 순간 내 이름 석 자를 한 번이라도 눈에 띄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이제는 아이디나 닉네임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그냥 이름을 쓰거나, 손 가는 대로 자판을 두드려 아무 의미도 없는 영어를 적는 것. ‘내가 김정현이요’ 하고 어필하든지 반대로 ‘내가 누군지 알 생각 마쇼’ 하고 꽁꽁 숨어버리는 이 합리적 작명식이 ‘정현쿤 더 이상 질풍노도 초중딩 아니고 서른 살 아재요~’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내 안에서 들끓는 욕망은 그대로인데 그걸 시원하게 보여주기는 망설여지는 게 어른이라는 존재인 건가. 민망함을 덜어낸 대신 재미를 잃었으니 아무래도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P가 아직까지 옛날 아이디를 바꾸지 않은 이유는 귀찮아서가 아닐 것이다. 고작 데빌 키스라는 이름을 짓기 위해 쓸데없이 심각해질 수 있었던 그 단순하고 솔직한 시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어서일지도. 이유가 뭐든 @psg0842보다 @devilkiss0842가 훨씬 더 귀엽다. 


매거진의 이전글 못 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