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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21. 2023

[다시 가고 싶은 이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

시간의 공기


[다시 가고 싶은 이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





밤 10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음, 원래 9시에 문 닫지 않나? 이상하다 싶어 슬쩍 눈치를 봤는데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정리한다. 수다는 이어졌다. 주제는 일이 부쩍 줄어 매달 최저치를 갱신 중인 월 소득과 요즘 재밌게 쓰는 글, 프리랜서 생활의 비애 같은 것들. 식어버린 카푸치노를 홀짝거리며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그러다 몇 분 뒤,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조용해진다. 강아솔의 ‘4년 전 5월 그때의 우리’였다.



4년 전 5월 그때의 우리

제주도 푸른 바다에 기대어

서로의 꿈과 서로의 바람을

밀려오는 파도에 실어 보냈었지



부드럽게 흘러가는 나일론 기타와 그 위로 읊조리듯 울려퍼지는 강아솔의 목소리. 공기가 바뀌어버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친구는 ‘여기랑 참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잠겨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나는 Y 사장님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창가쪽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등을 붙이고 엉덩이를 파묻을 때마다 참 푹신해서 좋아했던 의자. 커피 종류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골라 주던 빈티지 머그잔은 가지런히 줄을 지어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이전과 같은 커피를 주문했는데도 처음 보는 잔으로 바꿔서 가져다 주실 때면 ‘뭐야, 이건 또 왜 이렇게 예뻐!’ 내적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노란 조명 아래서 유독 더 따스해보이는 나무 벽을 지나, 책 구성은 바뀌어도 전체적인 기조는 일관된 ㄱ자 모양의 서가에 시선이 머문다. 읽고 싶은 책이 보이면 자유롭게 꺼내 읽어도 되는 카페 안의 작은 도서관이다. 문제는 너무 재밌었던 나머지 실수로 집에 들고 간 적도 있다는 것이다. 가방에서 나온 책을 보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메시지로 사죄의 말을 전했던 날을 떠올리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긴, 오랫동안 책을 못 돌려주다가 해외로 떠나기 직전에 죄송하다며 택배로 보내왔다는 손님도 있다.



마지막까지 공간 구석구석 한 장면이라도 더 눈에 담아야지 싶었는데 이 노래가 이렇게 기회를 줬다. 첫 곡을 시작으로 [당신이 놓고 왔던 짧은 기억] 앨범이 순차적으로 흐른다. 완벽한 고요의 순간이다. 까먹기 싫어서 음성 녹음 앱을 켰다. 멀리서 흐르는 음악에 에스프레소 머신과 제빙기의 소음, 친구와 Y가 나누는 대화까지 내가 보던 장면이 어렴풋한 소리로 담겼다. 녹음 파일을 저장하며 나는 확신했다. 분명 일부러 이 노래를 트셨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물어봤더니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어, 어떻게 알았지?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픈 마음에.” 





2023년 9월 22일 마지막 영업을 끝으로 시간의 공기는 문을 닫았다. 합정역과 상수역을 잇는 대로변에 가게를 연지 12년만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카페. 나는 9년 전 여름에 처음 이곳을 찾았으니 ‘시공'은 명실상부 나의 가장 오랜 단골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새로 정착할 카페를 찾아 방황하는 중이었다. 애정을 갖고 드나들던 상수동의 카페 스톡홀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합정동의 시간의 공기와 서교동의 아이들 모먼츠. 전자는 이미 이 동네에서 3년 째 영업중이자 스톡홀름 사장님의 친구가 하는 카페, 후자는 스톡홀름에서 일을 돕기도 했었던 H가 새롭게 오픈한 카페였다. 갈 곳을 잃었던 철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거처로 옮겨 갔고, 스물 한 살의 김정현 군은 고민 끝에 시공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아이들 모먼츠도 잊을만 하면 방문하며 여태 느슨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첫 방문날. 그때 나는 예감했을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꾸준히 이 카페를 다닐 거라고 말이다. 군대를 가고,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휴가 때마다 얼굴 한 번씩 비추다, 건강하게 전역해서 새로운 여자친구를 데려 오며,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대학 졸업과 불가능해 보였던 취업의 감격을 아메리카노 한 잔 앞에 두고 소소하게 누릴 거라곤 Y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사이 Y는 오픈 초기부터 다니던 단골 손님과 결혼을 했다. 얼마 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육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그녀를 대신해 남편이 매장을 지키는 일이 늘어났으며 부모를 쏙 빼닮은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컸다. 와중에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이 닥쳤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고민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 내색은 안 해도 밤잠 설치는 날들이 적지 않았을 테다. 어느덧 사람들은 하나둘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가격리 했던 날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시점에 와 있다. 



내 20대가 시간의 공기와 함께 흘렀다. 청춘의 일부가 담긴 카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무 살에 혼자 서울로 상경해서 신나고 짜릿한 만큼 팍팍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살아내던 나. 모든 게 내 맘 같지 않던 시절, 이 거대한 도시에서 단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장소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이었나. 합정역 7번 출구를 나와 5분 남짓 걸어가는 시간이, 낡은 벽돌로 만든 아치형 입구 아래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 다른 어떤 것보다 깊은 위안이었다. 단언컨대 시공이 없었다면 20대의 김정현은 조금 더 불안하고 쓸쓸한 일상을 보냈을 거다. 익숙해질수록 믿음이 쌓였던 것 같다. 오늘 어떤 일을 겪었든 기어이 또 달콤한 기쁨을 찾아내 만끽하고야 말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여기에서만큼은 지킬 수 있다고. 뜨거운 커피와 촉촉한 까눌레 한 입, 초겨울을 닮은 음악과 당장 여행 떠나고 싶게 만드는 문장의 숲, 창가 자리에서 고독을 즐기는 손님의 뒷모습과 나직이 물어오는 안부 인사를 체감할 때마다 나는 충분히 근사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나는 카페를 찾고, 카페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카페에서 혼자 잠잠히 있을 때 나아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건 아마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일 테고, 어쩌면 그런 나도 응원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카페에 홀로 앉아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 잔을 고른다. 한 모금의 커피 맛을 기억하려고 한다. 좋았던 카페들을 소중한 이와 함께 다시 방문하며 오늘 짓는 서로의 표정을 마주한다."


[임진아의 카페 생활] 다시 여름을 기다리며 - 까페여름 편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몰랐다.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아지고 싶었고 일단 합정동으로 향했을 뿐이다. 혼자 잠잠히 머물 수 있는 안락한 자리와 다정한 눈빛으로 응원을 건네는 Y가 반겨주는 카페로. 20대 내내 시간의 공기로부터 내가 받은 건 ‘지금 가장 필요한 한 잔’이었다.



모든 영업을 종료하고 맞은 주말. 카페에서 사용했던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는 플리마켓이 이틀간 열렸다. 늦여름의 더위를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밀어낸 토요일 오후에 나는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양손에 컵과 그릇과 책 따위를 가득 들고서. 섭섭하고 아쉬웠지만 이 물리적 증거들이 나의 가장 오랜 단골 가게를 더 자주 떠올리게 해줄 거라 생각하면 되려 고마운 마음이 커졌다. Y의 얼굴은 밝았다. 계산과 포장으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한 명 한 명 살펴보며 오래 기억하려는 듯 눈에 담았다. 다들 돌아가고 가게를 정리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에게 어떤 감정이 찾아왔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후련함이 조금 더 앞섰기를 바랄 수밖에. 



이 공간의 시작은 지켜보지 못했으나, 끝은 함께할 수 있었다. 옛 말에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했으니 염치 없지만 얼른 또 다른 시작을 열어주시길 간곡히 기대해본다. 수고한 만큼 푹 쉬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주시길. 여전히 불안정하고 바보 같은 나의 30대를 기억해줄 카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공기

서울 마포구 독막로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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