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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09. 2024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이 시점에 <나의 해방일지>를 만난 건 행운이다. 아니, 운명인가? 2024년 하반기는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오래된 상처의 실마리를 찾았고, 그래서 문 하나를 열었고, 삶을 향한 진짜 믿음이 피었다. 요즘 나는 내가 궁금하다. 가끔 기특하고 자주 애틋하다. 더, 더 가보고 싶다.





이 드라마에는 길이 막힌 사람들이 등장한다. 노동 같은 관계에 갇혀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날들을 반복하는. 어디가 막혔는지 모르겠으나 뚫고 나가고 싶은 갈증만 차오르는.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원하는 건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은” 상태다. ‘이게 사는 거지!’ 말할 수 있는 충만한 해방에 이르는 것.





물러날 수 없는 삶의 과제 앞에서 미정은 추앙이라는 답을 적었다. 과거와 같은 사랑으로는 안 된다. 상대의 반응에 휘둘리거나 이런저런 계산 뒤에 숨지 않는, 외롭고 배고프니까 더 많이 달라며 갈구하는 게 아닌, 누군가를 정말로 채워줄 수 있는 전적인 응원과 지지. ‘날 추앙해요’라는 요구는 어느새 ‘당신을 추앙할게요’라는 약속에 이른다. 구씨가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겠다는 미정의 다짐은 한 명의 인간 앞에 또 하나의 인간으로 마주 서겠다는 의지다.





응원은 받는 사람만 구원하지 않는다. 힘닿는 대로 주다 보면, 서운한 감정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주다 보면, 그 응원이 나에게도 닿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 타인을 사랑할 수 없듯이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서 나를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주면, 받는다. 편견 없이 구씨를 받아들였던 미정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품게 되면서 비로소 해방에 다가선다. 도망가지 않고 삶을 직면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국이 온다.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나는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여름 한가운데의 미정은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자신의 볼품 없음만을 발견하는” 관계에 갇혀 있었다. 봄을 기다리는 미정은 이제 자유롭다.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2주 전에 종료된 심리 상담에서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이 드라마를 보며 마음에 닿은 것들은 우리가 대화 나눴던 내용과 결코 다르지 않은 이야기라고. 내 마음이 열려 있었기에 전부 내 삶의 메시지로 품을 수 있었던 거라고. 정현 씨는 사실 내내 준비해 왔던 거예요. 조금씩 해방되어 가는 과정인 것 같네요.


미정과 구씨와 창희와 기정이 그렇듯 내게도 완전한 해방으로 가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까 이렇게 살지”라는 말에 “나는 이렇게 살 거야”라고 대꾸한 미정처럼, 나 역시 내 삶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더 가 보고 싶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나의 해방일지 (2022)

JTBC
연출 김석윤
극본 박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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