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4
설 명절이 막 지난 2월의 어느 아침. 잠에서 깬 남편이 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식탁에 앉은 나를 등지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올해는 이사를 꼭 가야 할 것 같은데.”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남편은 직업상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사람이다. 이미 2~3년 전 거주지를 옮겼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나도 파악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가 이사를 미뤘고 각방 생활에 익숙해진 나도 잠자코 모른 척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먼저 이사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올 것이 온 걸까. 머릿속에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내가 알기론, 그가 가려는 곳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아파트 단지다. 깔끔한 새집에서 지금처럼 그와 생활비를 반반 내며 고양이 둘과 안정된 삶을 이어가 볼까. 환경이 바뀌면 글도 더 잘 써지고 어쩌면 그와의 관계도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럴 순 없을 것이다. 그도 나도, 쉽게 변하지 않을 테니까. 곧 다가올 50대마저 집안에서 촉각을 세우고 다투며 보낼 순 없지 않나. 남편의 성격과 습관을 누군가는 수용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어쩌면 너그럽지 못한 내 품성 탓일 수도 있다. 그걸 어떻게 고치겠는가.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지. 어쩌면 지난 5년 동안의 평화는 예정된 이혼 덕분에 누린 폭풍 전야의 잠잠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이걸 깨닫고 나자 불안하게 뛰던 심장도 차츰 안정을 찾았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그 사이 얼마간의 돈을 모았기 때문일 거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혼자 살기엔 너무 넓고 관리비도 많이 나간다. 그러니 나도 이사를 가야 한다. 그동안 틈틈이 부동산 앱에 들어가 파악한 시세에 따르면, 모은 돈으로 내 최소 기준에 맞는 집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최소 기준이란 방 2개, 전세, 12평 이상의 빌라 또는 아파트 정도다.
글만 써서는 돈을 그만큼 모으지 못했을 텐데 운이 좋게도 그사이 내 이름의 책이 세 권이나 나왔다. 작가란 호칭이 붙으니 주변에서 글쓰기 강의를 요청했다. 이 또한 운이 따랐기에 가능했음을 지금은 안다. 날마다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훈풍처럼 불어오는 나날. 경제관념이 없던 내가 책과 강의로 번 돈을 통장에 붙들어 두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소비의 충동이란 엄청나게 센 것이었으니...
혼자 살아갈 집을 얻을 수 있다는 것. 5년 전 처음 이혼을 떠올릴 때와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랐다. 한겨울에 털조끼를 속에 든든히 껴입고 먼 길을 나서는 느낌이랄까. 발밑이 뻥 뚫린 듯한 불안도 작아져 있었다.
이후 남편과 몇 번의 대화 끝에, 그도 나와 각방 쓰며 냉랭하게 지내는 게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린 4월부터 집을 알아보고 각자 이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른바, 이혼할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