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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27. 2024

나이는 못 속이지

봄 7

버스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가는 길. 지난번 면접 때 한 번 와 봐서인지 벌써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매장엔 전임자 대신 점장 혼자 있었다. 전임자들이 일을 관두면서 후임자에게 업무 전달을 확실하게 안 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일을 가르치겠다는 거였다.     


점장은 첫인상처럼 깔끔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기억해야 할 것들을 메모하려고 손바닥만 한 수첩과 필기감이 좋은 볼펜을 챙겨 왔는데, 점장의 말과 행동을 도저히 받아 적을 수 없었다.     


“그냥 영상으로 찍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더 확실해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영상을 찍는 건 내겐 아직 어색한 일이고, 어쩌면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어 생각지도 못했다. 먼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점장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 아마 젊은 알바생들과 일하다 보니 그런 감각이 생긴 게 아닐까. 아니면 편의점 업무가 도무지 말로는 배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포스기’라고 부르는 계산기 다루는 일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고 글로 적을 것인가. 박스에 담겨 온 물품의 바코드를 단말기로 찍어 ‘입고’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튀김기 다루는 방법은 또 어떻고. 직접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전달법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기억법이다. 나는 마음 놓고 핸드폰의 ‘비디오’ 버튼을 눌렀다.     


일곱 시간 동안 점장을 졸졸 쫓아다니며 찍은 영상이 서른 개가 넘었다. 그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건 역시 포스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10년 전 생협에서 사용하던 포스 기계와는 복잡함의 차원이 달랐다. 요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땐 포인트 적립과 통신사 할인이 기본이었다. 편의점에서 택배도 보내고, 또 물류센터를 통해 받은 택배를 고객에게 전달도 해야 한다. 심지어 배달 주문도 받는다! 이 모든 작업은 포스를 거쳐야 하는데 그 방법과 순서가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 미적분 설명을 듣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밤 열 시. 다음 근무자와 교대한 후 점장과 함께 편의점을 나왔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아 네, 해봐야죠.”

“근데 아까부터 너무 힘들어하는 거 같아.”        

  

역시 점장은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업무를 배운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부터 내 정신은 이미 흐물흐물 몽롱한 상태였다. 일이 복잡한 것도 그렇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다. 면접 당시 점장이 “어디 아픈 데는 없죠?”라고 물었을 때 뜨끔했는데, 나는 고관절이 좋지 않다. 오래 서 있거나 많이 걸으면 오른쪽 고관절이 찌릿찌릿 욱신거린다. 글 쓰느라 의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탓이었다. 병원에서 척추 주사를 맞아도 그때뿐. 이제는 고질병이려니 하며 산 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점장과 헤어져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걷는데 다리가 로봇처럼 뻣뻣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관절에 귀을 갖다 대면 뚝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줘 발을 구르면 관절 부분이 똑 부러질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걸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눈밭을 걸어가는 펭귄처럼 보폭을 좁혀 발을 땅에서 조금 떼어내고 다시 내딛기를 반복할 수밖에.     


고작 하루 일했을 뿐인데 이럴 수가 있나. 이제  맘대로 일도   없는 몸이  건가. 역시 나이는  속이는 건가. 이런 몸으로 살아 나갈  있을까. 뻐근한 고관절 쪽으로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뻣뻣하고 아픈 부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주었다. 손이 보내는 작은 위로. 이렇게  서러움을 가라앉힌다.

   

집에 돌아와 낮에 찍은 영상들은 제쳐두고 유튜브에 ‘고관절 운동’부터 검색했다. 그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 홈요가를 하며 몸을 풀었는데, 그날은 도저히 요가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굳은 다리를 어떻게든 달래서 써야 했다. 이 다리에 앞으로 나와 고양이들의 안정된 삶이 달려 있으니!     


물리치료사들이 올린 영상들 중 유독 눈에 띄는 것 있었다. 다리를 펴고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는 간단한 동작 서너 가지를 모은 영상이었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시원해졌다. 방석을 반으로 접어 깔고 앉아 천천히 따라해 보았다. 무릎 뒤편 근육, 허벅지 안쪽 근육 등 하체 곳곳이 아우성을 친다. 신음을 참으며 동작들을 다 끝냈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또 의자에 앉았다가도 틈틈이 그 동작을 반복했다. 다행히 내겐 본격적인 첫 출근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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