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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혜진 Oct 22. 2023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1990년 5월 2일 수요일
2달 만에 연필을 드니 정말 이상하다. 나는 지금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중학교 추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인천. 진해의 집을 버리고 3월 17일날 여기로 이사왔다. 나는 4월 19일부터 한샘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9990년 5월 3일 목요일 흐림
오늘 엄마와 아빠께서 싸우셔서 기분이 나쁘다.     


1990년 5월 4일 금요일 안개 끼다가 차차 갬
오늘 언니가 소풍을 간다. 나는 언니가 너무 부러웠다. 엄마께서는 김밥을 만드셨다. 나와 엄마는 점심과 아침을 김밥을 먹고 나는 4시 10분이 되어 학원에 갔다. 학원에 갔다가 버스에서 내리니까 여느 때처럼 아빠께서 계셨다. 아빠께서는 바로 앞에 있는 통닭집에 통닭을 맡겨 놓았다고 하셨다. 양념통닭 1마리, 후라이드 치킨을 사셨다. 집에 와서 먹고 이만 잔다.     


*     


아빠는 1989년 7월 29일에 대만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러 여기저기 오가며 애쓴 흔적이 내 일기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여전히 아빠는 일을 찾지 못했다. 엄마는 이모에게 생활비를 빌려 썼다.     


3월 17일, 우리는 인천으로 야반도주했다. 아빠가 친구에게 진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동네의 아주 친한 이들에게만 이주 사실을 알렸다. 인천엔 작은고모가 산다. 작은 고모부가 하는 건축일을 아빠도 함께 하기로 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어둑해질 무렵 도착한 인천집엔 대문이 없었다. 시멘트로 마감한 집은 가로로 길쭉했고 출입문이 세 개, 작은 창도 세 개 달려 있었다. 각각의 출입문마다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가운뎃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이고 이어서 아주 작은 방 두 개가 나온다. 아끼던 책을 모두 다 버려야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집은 산 밑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15분 동안 산을 향해 올라가야 했다. 우리의 양 옆집엔 각각 치매 노인을 포함한 일곱 가족과 한때 ‘화류계’에서 일했다는 중년 여성이 살았다. 그들은 우리를 크지도 작지도 않게 덤덤히 반겨주었던 것 같다. 그들과 부딪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딪히는 건 여전히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이었다. 더욱 빈번하게 밤마다 큰 소리로 다툼을 벌였는데, 양쪽 집에선 항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다행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했다.      


일곱 식구의 아주머니는 엄마와 비슷한 또래였다. 진해의 넓은 집에선 싸움을 숨길 수 있었지만, 얇은 벽 하나로 나뉜 동네에선 옆집에서 텔레비전 몇 번을 보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아주머니에게만큼은 털어놓았다. 방음이 되지 않는 건물 덕분이었다. 숨길 게 없는 동네에서 숨길 수 없는 일상을 마주하며 사는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부모님이 다투고, 다음날 엄마는 퉁퉁 부은 얼굴로 꽉꽉 김밥을 말고, 언니는 김밥을 들고 어쨌든 소풍을 나선다. 아빠는 싸운 것이 미안해 통닭을 산다. 그리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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