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4주 차의 후기
스타트업에 들어왔다. 들어올 때 함께 낸 대기업도 채용 프로세스 중간에 있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쪽을 포기하고 스타트업을 선택한 이유는 아래의 이유들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안일하다고도 한다 ^^a
6-70명 규모 스타트업의 '첫 번째' 디자이너
집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25분 (대기업은 90분)
잡플래닛 4.2점 (카카오, 네이버가 3.9인데?)
서비스 후기가 업계 내에서 좋은 편
연봉을 어느 이상으로 맞춰 줌
첫 출근 후 1달이 안된 시점에서 느끼고 있는 부분들을 정리해본다. 이 회사는 작년까지 직원 수가 약 20명이었는데, 현재는 60명이 넘는다. 회사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입사 시기가 궁금해져서 물어보면 대부분이 1달 전, 작년인 경우들이 많다. 나이대는 척 보아도 20대가 많고 의욕적인 젊은 사람 느낌(?)이 슬랙 채팅창에서도 전해져 온다. 교육 서비스인 것도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수강생들의 의욕을 북돋는 역할을 맡은 직원이 많아 직원들 스스로도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넘친다.
주변에 스타트업 대표들도 있고, 남편도 그렇고, 나까지도 스타트업에 들어오게 되니 '회사'라는 조직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대학원 이후로 전체 조직이 한눈에 다 보이는 규모에서만 일해왔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의 흐름, 각 팀의 능력치와 성과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인사팀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이 허튼 게 아닌 것이, 작은 조직일수록 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큰 조직들보다 훨씬 크다. 나는 입사하면서 이 회사의 신규 입사자 온보딩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어서 회사 적응을 금방 할 수 있었는데, 전에 인사팀에 계셨던 능력자 분이 이 시스템을 모두 잡아주고 나갔다고 한다. 전에 팀원이 프로젝트마다 바뀌는 회사에 있을 때도 들어가자마자 능력치가 높은 후임들과 편하게 일하면서 '학사 졸업생들 퀄리티가 엄청 올라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운이 좋았을 뿐, 그렇지 못한 후임을 만나 프로젝트를 거의 혼자 진행하다시피 하고 나서 부랴부랴 회사 채용공고를 업데이트한 경험이 있다.
나는 좋은 직원의 조건은 업무능력만큼이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사팀에서도 여러 인성검사와 컬처 핏 면접을 통해 회사와 맞는 사람을 가려내려는 시도들을 하는데, 안 하는 거보다야 낫겠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스타트업(혹은 작은 회사) 직원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현재로서는 이렇다.
회사에는 교육에 큰 비전이 있어서 입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들어온 사람도 있다. 각자 맡은 포지션이나 해당 업계 분위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가령 동일한 직무의 처우에 대한 갭이 대기업과 비교했을 때 너무 커지고 있다던지) 각 직원의 태도나 생각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 큰 임팩트를 내볼 수 있는 환경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회사에 들어올 때 나에게 중요했던 조건 중 하나는 '첫 번째 디자이너'라는 부분이었다. 서비스디자인을 접했을 때, 디자인이 총체적인 문제 해결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은 설계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스타일을 잡을 때 조차도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디자이너로 들어가면 백지에서부터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회사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맡겨진 단기 프로젝트는 수강생 모집 단계에서의 이탈률을 줄이는 일이다. (내 머릿속에는 정말 중요한 '급한 불 끄기' 프로젝트) 현재 탑승률이 데이터로 나와있기 때문에 리디자인에 대한 임팩트를 숫자로 받아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가 스타트업에서는 직원 한 명 한 명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 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 정확하게는 "가난한 집"의 주인이 되는 일인 것 같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때로는 인프라가 좋은 회사에서 일해오던 사람이 스타트업에 들어오면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과 때로는 업무 역량이 떨어지는 직원들과 함께 집을 나누어 쓰며 지저분한 집을 혼자 정리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이다. 가령 영업도 그 전에는 지명도 높은 브랜드 제품에 대해 갑으로서 영업을 해왔다면, 스타트업에 들어가서는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제품에 대한 영업 포인트를 잡아내야 해서 전과는 다른 스킬을 요하게 된다.
들어와 보니 건드리고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엉망이죠?'하고 묻는 질문에 '네에ㅎㅎ'하고 대답한다. 전에 컨설턴트 경험으로 인해 프로덕트 디자인에만 머무르질 못하고 여기저기 관여하고 싶은 오지랖도 생긴다. 하지만 일은 단계적으로 해야 하며 페이스 조절을 할 줄 아는 것이 프로인 것 같다 (나이 들어서 힘이 빠진 건 절대 아니다, 크흠). 결국 내가 원하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그 시점과 방식은 지혜롭게 판단돼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스타트업들이 그렇듯 성장단계이기 때문에 군데군데 허술한 것은 당연하며, 전에 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이 회사는 1년 차 직원이 전체 직원의 2/3이다. 그 사람들도 지금 열심히 급한 불을 꺼가며 환경을 개선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회사가 이렇게 커지리라 생각 못하고 자신의 파트에 매진해 온 나머지 1/3 역시도 탓할 수 없다.)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서비스에 대한 후기도 많이 찾아봤는데 업계 내에서 후기가 꽤 좋은 편이었다. 마케팅도 빵빵하게 하고 LMS도 잘 갖추어진 타 서비스에 비해 그러한 부분들이 빈약한데, 후기를 남겨준 소수의 수강생들의 블로그 글이 너무 정성스러웠다. 타 서비스의 확신에 찬 마케팅이 실제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 수준에 못 미쳐 역효과가 발생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이 회사가 코스 운영 면에서 뭔가 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갈 길이 멀지만 현재로서 나쁘지 않다.
일단은 탑승률부터 잡자! (급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