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ri Nov 01. 2021

모두가 디자이너인 시대의 디자이너

전통적인 디자이너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몇 개월 전에 프로덕트 디자이너 채용을 위해 서류심사를 진행하였는데, 지원자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정 커트라인을 넘어선 포트폴리오들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보다도 비주얼이나 구성면에서 상향평준화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인터넷의 발달은 많은 디자인 자원의 접근성을 낮추어주었고, 잘 정리된 아이콘 세트, 전문적인 PPT 디자인 포맷, 포토샵 샘플 등 온라인에 공개된 자원만 잘 활용해도 멀끔한 포트폴리오는 금방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개발의 오픈소스처럼 디자인도 많은 오픈소스들이 생겨난 것이고, 디자인의 오픈소스는 개발과 다르게 보안 이슈도 에러도 잘 안 생긴다.) 공간 디자인을 하는 친구는 직원 하나를 채용했는데, 뽑고 나서 보니 그 직원이 제출한 포트폴리오가 대부분 핀터레스트에 나온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정체성과 유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정보과 자원의 접근성이 낮아짐에 따라 디자인은 실력은 상향평준화되지만, 필요한 디자이너 수는 전보다 훨씬 적어진다. 특히 비주얼 파트에 전문성을 두는 디자이너들부터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예전부터도 정말 독자적인 비주얼 스타일을 만들고 트렌드를 선도하는 디자이너는 업계 종사자의 몇 프로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나머지는 무엇이 보기 좋은지를 학습과 경험을 통해 알아가면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턴을 찾아내서 재창조를 해내는 부분에 있어서 인간보다도 훨씬 월등한 AI와 자동화와 관련된 주변기술의 발달에 따라 일자리가 많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지금도 GUI 디자인의 경우 디자인 시스템 등으로 인해 업무가 효율화돼서 동일한 업무에 예전만큼 많은 디자이너가 필요하지 않아졌다.


그다음은 UXUI, 서비스 디자인과 같은 좀 더 기획적인 영역인데, 전자보다는 정량화시키기 어려워 AI의 진입은 늦어지겠지만 이쪽의 경우 타 전공생들에게 자리를 많이 내주게 될 것 같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이자 인지과학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디자인을 "현재보다 더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활동"이라고 정의 지었다. (이 유명한 디자인 정의를 디자이너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는 서비스 디자인과 UX 디자인 업무를 하는 동안 디자인 툴을 사용하거나 스타일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전공도 다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도 그들도 모두 허버트 사이먼의 정의에 따라, "디자인"을 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마침내 토스에서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하지 않는 디자이너 채용을 시작했고, 생명공학을 전공한 친한 동생도 대기업에서 UX 디자이너로 근무를 시작했다. 디자인의 정의가 확장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디자인씽킹 방법론은 "창의력"이라는 환상을 프로세스화 시켜 모두에게 접근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그에 따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영역은 디자이너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기획에 가까운 디자인은 상황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이 부분은 문과생들이 더 훌륭하게 해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용자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프로세스만 익혀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면 디자이너 고유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고 전통적인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연히 본 유튜브의 디자인 소리 채널에서 홍익대학교 IDAS 나건 교수는 디자이너의 고유 기술을 "가시화와 실체화(Tangibilization)"라고 말하였고, 이 부분에 공감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정확한 문제 정의부터 시작하여 콘셉트를 만들어가는 일은 이제 모든 전공에게 오픈이 되었지만, 실체화를 시키는 영역은 여전히 디자이너들의 고유 능력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서비스디자인이나 UXUI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도 오너십을 가지고 해내야 하는 영역이 이 부분이다. 이 파트는 스타일링보다는 넓은 개념이며 나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로 많이 써왔다. 글을 쓸 때, 쓰는 용도에 다양한 문체가 있듯 디자인도 용도에 따라 표현 방법이 달라진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야 할 때, 눈길을 사로잡아야 할 때, 어떠한 현상을 발견해야 할 때 등 다양한 콘텍스트에 따라 표현방식은 달라진다. 물론 다빈치형 사기캐들은 굳이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아도 이런 부분까지 커버하는 경우들이 있겠지만 (실제로 정보디자인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학자다), 웬만해서는 디자이너의 고유 영역에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즘에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퍼블리싱이나 개발을 잘하는 디자이너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 나처럼 디자인 리서치나 기획으로 빠지는 디자이너들도 생겨나고 있다. 사실 주변에 아트스쿨을 나온 친구들 중에 1/3은 조금씩 다른 분야로 걸쳐져서 '이것도 디자인이 맞나?' 싶은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 천재적으로 비주얼 디자인을 잘하지 않는 경우 할 줄 아는 영역을 넓혀놓는 것은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 주변 기술을 익힌다고 해도 디자이너 본연이 갖춘 고유기술에 관한 부분을 제대로 못해내는 순간, 개발자나 PM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본진을 철저히 지키면서 확장을 해야 할 것 같다.


추신.

AI와 자동화에 잡아먹히는 것은 디자이너만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직업군보다 '더' 암울한지는 모르겠다. 말로 지시하면 웹사이트를 만들어주는 AI도 나왔다고 하니, 개발자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무서운 AI...

매거진의 이전글 스타트업 첫 번째 UX 디자이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