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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ienna May 19. 2016

그와 함께라면 뭔들, 배우 폴 러드

망가짐을 두려워 않는 멋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본 관객이라면 '앤트맨'과 '스파이더맨'의 활약을 기억할 것이다. '앤트맨' 역할을 맡은 Paul Rudd 폴 러드는 영화에서 보인 모습 그대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분 좋은 배우다. 누구나 좋아할듯한 평범하면서도 훈훈한 외모에 멋과 유쾌함의 경계선을 거부감 들지 않게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이다. 하지만 남자가 봐도 은근히 멋있다고 느껴진 건 <앤트맨>이 가장 큰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달콤한 남자로 변신해 여심을 사로잡은 적도 간간이 있었지만 남심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백 퍼센트 현실감 돋는 전형적인 남자다움과 소위 말해 병맛 유머 코드로 망가짐을 자처해서이다. 유치원생들도 웃고 갈 방귀 농담에서 성인들이 웃고 갈 19금 농담까지 가능한 넓은 범위(?) 폴 러드식 유머는 희한하게도 기분 나쁘지가 않다. 그는 배우로서 엄청난 미남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그의 강력한 무기로 보인다. 물론 아무리 평범해 보여도 누구에게나 특별한 이야기는 있는 법. 웃음을 잃지 않는 폴 러드, 그의 이야기에 빠져본다.  

"20대 때는 가끔 내가 호감가게 생겼다는 게 거슬렸었다. 항상 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거나 '별 다를 것 없는' 배우로 표현되었었다. 내게선 그 어떠한 강렬함이라던지 위험한 남성미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슬픈 과거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향한 '호감'이라는 게 답답할 때도 있었다.

관객들은 어떤 영화를 보다가 새로운 배우를 보고 그 (혹은 그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오로지 그 배우만 보러 길 건너 영화관에 가게 만드는 마력의 배우가 아닐 때가 있다. 폴 러드가 그런 듯했다. 호감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함도 마찬가지였다. 배우 시절 초창기 때 <클루리스>로 특유의 달콤함으로 단번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지만 그 이후에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감명 깊었던 영화 <내가 사랑한 사람>에서는 매력적인 동성애자 '조지'로 출연하여 제니퍼 애니스톤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연기했고 <사이더 하우스>에서는 하반신 마비를 앓는 2차 대전 참전용사를 연기했었다. 코미디가 그의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이지만 진지한 정극 연기도 충분히 소화 가능하다는 걸 일찌감치 증명했던 러드였다. 물론 그가 희극과 제대로 만나게 된 때는 2000년도를 들어서고 난 후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웃음 넘치는 시절 전에 사뭇 어두운 날들도 있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던 <클루리스> 촬영 전, 그의 친구 '저스틴'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4살 러드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저스틴은 당시 그와 함께 연극 활동을 하고 있었다. 둘도 없는 친구는 아니었어도 그의 죽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하고 심각한 자아성찰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하는 러드. 마치 사춘기를 다시 겪듯이 답 없는 인생에 계속해서 질문을 내던지는 쓸데없이 철학적이고 이유 없이 불평, 불만, 분노만 커져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은 이후 <클루리스>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구와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강도를 당했다.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강도는 총을 꺼내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거 진짜 총이다. 조심해, 나 진짜 너 죽일 수 있어." 러드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강도는 "내 말 안 믿는구나"하며 러드를 향해 총을 쐈다. 총알은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돈은 없지만 당신이 원하는 아무거나 다른 거를 가져가도 된다는 피해자의 말에 강도는 가방을 빼앗고 도망쳤다. "[총알] 소리가 기억나요. 주차장에 사람들은 정말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전 굉장히 침착했어요. 다음 날 바로 촬영을 하러 가야 했죠. 클럽 씬이었어요. 그 전날 밤에 총 맞을 뻔한 놈이 미친 듯이 춤추는 꼴이 된 거예요." 영화 크랭크업 이후에도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교통사고만 연달아 세 번이나 났었다고 한다. 주차된 본인의 차량에 접촉 사고를 낸 후 사라진 운전자도 있었고, 친구의 차를 빌려 운전하다가 하이드로 플레이닝 현상으로 다른 차량과 부딪혔고, 렌트카를 빌렸는데 어느 날 아침 누군가가 렌트카까지 박은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벗어나야 하나 고민만 하던 그는 우연히 그가 동경하던 배우 톰 헐스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와 나눈 짧은 대화로 러드는 뉴욕으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럴 마음이 있다면] 뉴욕에서 살아봐. 맘에 들 거야." 이 한마디에 갈팡질팡하던 러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미련 없이 엘에이를 떠났다.

<웻 핫 아메리칸 썸머>라는 컬트영화로 재수없고 싹수 노란 철부지 '앤디'를 선보인 후 2002년도에 지난 10년간 해왔던 작품 활동을 무색하게 만들 미국 텔레비전 대작을 만나게 된다: <프렌즈>. 폴 러드가 '앤트맨'으로 낙점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앵커맨>의 '브라이언 판타나'가, <프렌즈>의 '피비' 남편이 앤트맨이 되다니" 하며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러드는 '소품 역할'이 될까 봐 두려웠지만 세계인들이 사랑했던 이 시트콤의 상징인 '센트럴 퍼크 카페'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설레었었다. '레이첼' 역할로 유명한 제니퍼 애니스톤과는 이미 무명시절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러드. 그가 '마이크'로 피비의 소개팅남으로 출연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 지라도 피비의 남자친구이자 장래 남편으로 발전될 것은 필연이었다. 서로 돈독한 우정과 의리로 연예계에서도 유명했던 여섯 명의 주연 배우들 사이에서 척하면 척인 그들의 호흡에 뒤처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제 7의 멤버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폴 러드의 마이크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제작진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러드는 극에서 단번에 그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그리고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프렌즈>의 시즌 9와 10에서 그나마 건진 진흙탕의 진주라는 극찬을 받곤 했다.

"여태껏 맡았던 그 어느 역할보다 피비 상대역으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본다. '어이, <클루리스>에서 걔'라고만 불리던 내가 '어이, 피비 남친'으로 바뀌더라. 그거야말로 성공스토리다.

피비 남편 마이크 이후로 러드는 코미디를 둘러싼 필모그래피를 점점 더 개척해 나갔다. 코미디로 향해 불어오는 태풍에 제대로 합류한 것이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명대사 읊듯이 '소신 발언'을 내뱉는 영화배우들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개인 의견을 내비치는 러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장르였다. 예를 들자면 어릴 적부터 음악을 워낙 좋아했던 그는 예술가든 화가든 그래픽 아티스트든 무언가가 되고 싶었는데 대중 연설 수업을 듣고 난 후 배우로 꿈을 전향했다고 -- 이제 와서 <아메리칸 아이돌>에 출연하는 참가자들의 참여 이유를 들어보면 어쩔 수 없이 좀 웃기다고 말한다.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다느니, 내 노래를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느니, 음악이 마냥 너무 좋다느니 라고 하는데... "간단해요. 우리 모두 관심받고 싶어 하는 것뿐이에요 -- 그게 다예요. 그냥 솔직해지자고 우리." 그리고 그의 진정한 희극인생은 <앵커맨>으로 시작됐다. 앞으로 수많은 영화 작업을 함께 하게 될 주드 애파토우 감독과의 인연의 시작이기도 했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와 같이 두 영화는 인기나 흥행을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작품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난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고 즐길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할리우드의 먹이 사슬을 얘기하자면 나는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일하면서 기분 좋은 경험들을 겪고 싶다. 거추장스럽게 예술을 위해서 비참하게 일하는 건 참... 비참한 것 같다. 모르겠다, 막상 하라면 하겠지만 즐기지는 못 할 것 같다. 중요한 건 관객들이 코미디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힘든 세상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웃고 위로를 받고 싶어서인 것 같다."

폴 러드의 코미디 영화들은 개그맨 출신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많고도 많고 재미있다. 앞서 말한 <앵커맨><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외에 <사고 친 후에>, <사람 만들기>, <알러뷰 맨>, <디너 게임>, <원더러스트>, <아워 이디엇 브라더> 등등 여러 가지 작품들을 통해 흥행과 주/조연을 떠나 러드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제일 웃긴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동시에 정극 출신 배우답게 <월플라워>에서 "사람은 생각한 만큼만 사랑받기 마련이거든"이라고 담담히 조언하며 학생만을 위한 진중한 선생님으로 나와도 웃음끼 하나 없이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흡입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최대 강점은 한 작품 안에서 세심하고 예민한 감수성과 지극히 무던하고 무관심한 둔감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다. 감정의 극과 극을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그 둘의 차이를 굳이 꼬집어낼 필요 없이 능수능란하게 섞어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인물 안에서 두 성질을 선보이며 더더욱 인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이는 러드의 방식대로 창조해낸 '앤트맨/스캇 랭'만 봐도 역력하다. (폴 러드는 <앤트맨>의 공동작가 이기도 하다.)

"글을 쓸 때나 연기를 할 때나 좀 진지하거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것 같으면 농담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그게 더 감명 깊다. 실제로 내 불안감과 약점들을 그런 식으로 대처한다. 인생에 비극적인 일이 생기면 정말 웃지 못할 농담을 하곤 한다. 몹쓸 짓이다."  

그의 말 곧이 곧대로 그는 실생활에서도 슬픔을 웃음으로 이겨내려는 흔적들이 보인다. 2008년 부친상을 당했던 그는 그 후 어느 날, 친구들과 차를 타고 뉴욕 북부 쪽으로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러드는 DJ를 자처하며 70년대 노래를 틀어놓았었는데 내용이 꽤 심오했다: 정작 선수로는 한 번도 뛴 적이 없는 아이가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의 소속이었다. 그 와중에 항상 경기를 보러 오는 맹인 남자가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 날에는 그가 없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하프타임 때 전화통화를 하러 간 그 아이도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었다. 그의 팀은 처참하게 패하고 있었고 선수들은 하나같이 다 부상당하고 있었다. 코치가 그 아이 어디 있냐고 소리쳤더니 떡하니 그 아이가 나타나 뛸 수 있게 해달라고 고집부렸다. 상상도 못한 환상적인 활약이었다. 코치가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배운 거냐?' 아이가 답했다, '제 아버지가 맹인이신데 방금 하프타임 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금 처음으로 제가 뛰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러드는 한참 노래에 빠져있었지만 그의 친구들 중 한 명은 살짝 속상해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맹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그랬어요. '내 아빤 죽었는데 뭐, 내가 더하지.' 그 친구한테는 아버지가 겨우 맹인이신 것뿐이라고 약 올리기까지 했어요. 그런 게 전 웃기더라고요. 안 좋은 일을 대처하는 저만의 방법이지만 아버지가 이 얘기를 듣고 웃으시는 모습도 상상이 가요. 아버지와 좀 더 가까워지는 기분도 들고 정말 그냥 웃겨서 그러는 거예요. 이것도 되게 약한 거예요. 열 배는 더 심하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인터뷰 도중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는 그.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결국 한 말은 "괜찮아요 정말로. 아버지는 정말 재밌는 분이셨어요"였다. 

2008년 11월, 부친상을 당한지 얼마 안 되어 SNL 호스트를 맡게 되었던 러드. 그의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들떠있었지만 결국 아들의 SNL 출연을 보지 못했다. 쇼 막바지에 비욘세와 저스틴 팀버레이크 사이에 서있던 그는 나머지 무리에서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아버지가 해군 시절 때 입었던 셔츠. 두 손을 모아 셔츠를 꼭 쥐더니 하늘을 향해 키스를 날렸다. 짓궂은 농담을 자처하는 그이지만 진실된 모습 또한 분명히 안고 있는 폴 러드다. 스크린 안에서는 그가 출연한다면 그 어느 영화든 그가 함께이기에 볼 재미를 주는 매력적인 배우다. 스크린 밖에서는 그 어느 배우보다 평범해 보일지라도,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무엇에든 웃을 거리를 찾는 그가 새삼 왜 특별한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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