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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희수 Oct 17. 2019

엄마와 함께 보세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습니다.

여느 때처럼 습관성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어보다 롯데 시네마에서 하는 시사회 응모를 발견했다. 대충 영화가 ‘82년생 김지영’인 것만 확인하고 바로 응모했다. 나중에 당첨 문자를 받고 보니 어머니와 딸이 동반해야 하는 이벤트성 시사회였다. 그렇게 엄마와 단둘이 ‘82년생 김지영’을 보게 됐다.


보통의 모녀 관계가 어떤지 다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녀는 그렇게 살가운 편은 아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바빴고 나는 나대로 독립적으로 자랐다. 사춘기를 보내며 엄마와 할 말이 점점 사라졌고 성인이 되고서는 엄마의 보살핌을 밀어냈다. 엄마와 단둘이 보는 영화가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궁금했다. 엄마가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해석할지. 엄마에게 여자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엄마의 이름을 지웠다.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감상평은 ‘난 이런 우울한 영화는 싫어.’였다. 조금 맥이 빠졌다. 내심 나도 엄마에게서 어떤 공감을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조금 있다 엄마는 ‘근데 벽에 갇힌 기분이 뭔진 알 거 같아.’하고 말을 붙였다. 영화에서 김지영은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사는 게 행복하지만 갇힌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매일 베란다에 나가 떨어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이유를 물어본 적 있다. 회사도 지겹고 만삭의 몸으로 출퇴근이 힘들어 그만뒀다고 엄마는 무심하게 말했었다. 그런데 가끔 아직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회사 동기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 내가 했던 말 중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 ‘엄마 다리 아파 집에 가자.’다. 엄마는 자가용도 없이 걸음마도 못 뗀 동생과 네다섯 살짜리 나를 데리고 집 밖을 나섰다. 엄마는 이상하리만치 매일 집에서 나가고 싶어 했다. 엄마도 김지영과 같은 표정으로 집 밖을 나섰을까.


가족관계란에 엄마의 직업은 항상 전업주부였다. 하지만 아빠의 벌이가 일정치 않아 엄마는 일생의 대부분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았다. 부족한 생활비, 우리의 학원비를 걱정하며 말이다. 엄마는 집에서도 노동자다. 집안 살림의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 있고 우리 모두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난 엄마를 너무나 당연히 ‘엄마’로 소비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엄마가 됐다. 그리고 여직까지 엄마로 산다. 엄마는 이름이 없다.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지워졌고, 그 아이들을 기르는데 홀로 남겨져 지워졌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지워졌다. 엄마는 ‘그땐 그게 당연했어. 다들 참고 살았어.’라고 말했다.


나도 내 이름을 지우게 될까.


난 결혼에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내가 다녔던 일터마다 능력 있던 그녀들은 결혼 후, 출산 후 사라졌다. 어린 마음에 커리어와 결혼은 양립이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엄마를 보면서 타인을 위해 닳도록 헌신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누군가’ 정한 결혼 적령기가 된 지금. 내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절대로 결혼은 하지 말아야겠단 결심은 흐려져갔다. 마음 한편으론 순진하게 막연한 해피엔딩을 그리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나오면서 먹먹함을 느꼈다. 그 먹먹함은 감동이 아닌 답답함이다.


김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 잘하면 되겠지 했다. 능력도 경력도 잔뜩 쌓아서 결혼이나 출산은 장애물이 되지 않게 지금 열심히 하면 되겠지 했다. 결혼이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일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했다. 어린애처럼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난 여자이기에 바람대로 살기 어려울 텐데도. 난 엄마가 엄마의 벽 앞에서 순응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의 이름을 기억한다.


난 지난 엄마의 삶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가족을 위해서 아내로, 엄마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다만 내가 당연하게 소비했던 엄마 말고, 노래를 좋아하고 춤도 잘 춰서 가수를 꿈꿨던 한 소녀로, 서울에 상경해 직장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사회초년생으로, 행복한 가정을 꿈꿨던 한 여자로 엄마를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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