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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Aug 28. 2022

눈 앞에서 피가 폭죽처럼 터졌다

영화 <놉>과 내가 하는 일

* 영화 <놉>(NOPE, 2022)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0. 고디와 가짜 이야기


고디가 왔다. 영리하고 어여쁜 고디. 고디와 행복한 가족이 나오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매번 아주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행복이란 별 게 있던가. 자극 없는 무구한 이야기. 생일,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같은. 나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며 사사로운 보람을 느꼈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있다. '고디'라 이름 붙은 저 침팬지는 무슨 기분일까. 강한 조명이 내리쬐고 대포 같은 카메라가가 바라보며 신경을 건드리는 슬레이트 소리가 가득한 세트장을 정말 집처럼 느낄까. 가끔 과장되게 깔깔대는 엄마아빠, 때로 눈이 마주치는 아이들, 예민한 부위를 자꾸만 만져대는 검은 옷의 사람들. 이들을 정말 가족처럼 느낄까. 이 모든 게 쇼이고 가짜라는 것을 '고디'라 불리는 침팬지들은 알까.


사건이 터졌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영 오락가락하던 침팬지였다. 먹던 바나나 껍질을 바닥에 내치는가 하면, 손을 잡으려 하니 격하게 뿌리치다 이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세트장을 향해 걸어가던 녀석.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풀려 있었지만 뭐가 대수인가, 어차피 훈련받은 침팬지일 텐데. 순조로웠다, 적어도 그 풍선이 터지기 전까지. '생일' 에피소드라고 말하니 폭죽은 절대 터뜨리지 말라고 당부하던 사육사가 떠올랐다. 폭죽 같은 풍선이 헬륨을 뿜으며 터졌고 녀석의 흥분 게이지는 한순간에 한계를 넘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과 목, 가슴이 먼저 찢기고 긁혔고 피를 보니 녀석은 더 발광했다. 아, 이 프로그램 전체 관람가였는데. 이제 다 끝났구나. 기억은 잘 안 나도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다가 세트장에 멀찌감치 다시 들어왔을 때 적막 속에서 멍한 기분이 들었다. '탕!' 침팬지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고 피가 폭죽처럼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위험천만한 야생동물을 데리고 어떻게 생방송을 진행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생방송이었으니까 그 정도 인기를 끈 것일지도. 언젠가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배에 카메라를 달아두고 24시간 내내 송출한 방송이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아무 일도 없는 그 바다를 보며 시청자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고디 사건'이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 특히 사회학과 언론학에선 이 사례로 수많은 논문이 쏟아졌다.


고디의 마지막 방송은 카메라맨이 놀라 도망치다 카메라를 엎어뜨리기 전까지 세상에 그대로 송출됐다. 그 방송은 그렇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됐고, 나를 비롯한 모든 방송 관계자들은 수없는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아, 물론 그 영상은 지금도 생생한 화질로 볼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조회수는 *튜브로만 30억이 훌쩍 넘었는데. 매년 고디의 생일마다 댓글 놀이를 한다던 소문을 들은 이후론 확인하지 않았다. 고디는 생일날 머리가 터지며 죽었는데, 뭘 축하한다는 건지.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이상한 걸 좋아한다.

  

1. 나와 진짜 이야기


언론계에 종사하다 보면 흔히 겪는 딜레마가 있다. 얼마나 담을 것이며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알려야만 하는 사건은 이야기가 되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필요 이하의 것을 보여준다면 미미해지고, 필요 이상의 것을 보여주면 폭력적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필요한 만큼'인가. 물론 언론계에 국한된 고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눈길 주고 몰입하며 감정을 크게 동요하는 이야기일수록 널리 퍼지고 오래 기억된다. 시청자는 자극을 좇고, 카메라는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집요하게 쫓는다.

예를 들어 볼까.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이며 극악무도한 일들. 혹은 믿기 어려운 기이하고 괴상야릇한 현상들. 무력한 세상에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들은 늘 존재한다. 이걸 당신만 알고 있다면, 당신만이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자는 쉽게 답한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과연 그게 완벽한 정답일까.


고디 사건으로 생각해보자. 글로 써볼까. TV쇼에 출연하던 침팬지가 풍선 터지는 소리에 흥분해 수십 분 동안 사람들을 잔혹하게 공격했고, 출동한 경찰이 침팬지의 머리를 쏴 상황이 종결됐다. 이 모든 과정이 영상으로 담겼다면, 이 영상 전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답일까? 그 영상엔 이미 사망한 사람의 선혈이 낭자하고,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채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는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갇혀 살 것이다. 그 뿐만의 문제인가. 유족들은, 아이를 출연시킨 가족들은, TV쇼에 연관된 수많은 관계자들은, 그 모든 영상을 지켜본 일부 시청자들의 트라우마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n차 피해 속에서도, 그 영상은 세간의 관심을 받을 것이고 그 영상을 본 모든 사람이 나이 들어 죽어도 그 영상은 죽지 않고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처음 그 영상이 세상에 나왔을 때의 자극은 무뎌질 것이고 사람들의 눈은 그 이상의 자극을 좇게 될지도 모른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 영상을 입수해 처음 보도하는 이는 아마 최선의 방법으로 이런 선택을 할 것이다. 잔혹한 영상이 포함돼 있다는 안내 문구와 함께, 블러가 떡칠된 상태에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정도의 영상까지만 보여주는 것. 물론 이 선택은 모든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덜 큰 파장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상은 결국 허상이다. 모든 이야기엔 결국 가치 판단이 담기고, 심지어 모든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또한 가치 판단이 담긴다. 그 모든 2차 피해를 감수하고서 더 큰 파장을 일으켜 알려야만 한다는 신념이든, 역사에 남는 영상을 남겨 조회수를 벌겠다는 헛된 판단이든.


언론계에 그리 오래 몸을 담은 건 아니지만 와중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매일 같이 전쟁의 참상을 봤고,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사건은 매일 제보 창을 메우고 있었으며, 그릇된 신념을 가진 이들의 극악무도함과 이중성을 봤고, 이 모든 폭력과 자극들은 두 가지 질문과 싸워야만 했다. 1) 진실인가? 2) 진실이 맞다면 얼마나 담을 것이며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더구나 이 고뇌의 과정엔 오랜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가장 정확한 진실을 파악해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가장 빠르게 세상에 알리는 일.


그런 일에 절어 있을 때 <놉>은 거대한 메타포로 다가왔다.


2. 똑바른 눈


펜이 칼이 된 시대를 지나, 카메라가 총과 대포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늘 금기에 도전해왔고, 신을 기어코 응시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보지 않아도 될 것들,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만 있다면 전부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세상에 드러나야 할 비극과 금기가 드러나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고 믿는다. 결국은 '찍는 사람', '담는 사람'의 딜레마는 본인의 가치 판단에 달려 있다.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 1895)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더 행복해졌고 더 불행해졌다.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 1895)를 보고 멀미하며 뛰쳐나가 토하던 사람들은, 127년이 지나 자극적인 영화를 보며 "저거 어차피 가짜야"라 말하며 슬래셔 무비 같은 현실을 영화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카메라가 절대 권력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카메라 들지 않은 이를 찾아보기 어렵고 CCTV라는 빅 브라더는 원치 않은 우리까지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다. 휴대전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구 반대편의 일상을 볼 수 있고, 눈앞의 현실보다 큰 자극이 거대한 밀물처럼 쏟아진다.


마치 절대자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폭력적으로 내려찍는 렌즈ㅡ단순히 구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ㅡ가 있는가 하면, 세상이 우릴 향해 파고드는 폭력을 집요하게 들춰내는 렌즈가 있다. 영화 <놉>에서 자극에 물든 이들은 모두 '진 재킷'에게 잡아먹혔다. '고디'가 진실이 아니라 욕망을 응시하던 이들의 눈동자를 알아보듯. '진 재킷'은 자극과 욕망에 무뎌진 우리 자신을 빨아먹는 카메라다. 아까 썼던 문장을 다시 인용해보겠다.


시청자는 자극을 좇고, 카메라는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집요하게 쫓는다.


내가 생각한 '진 재킷'의 메타포는 이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놉>에서 먼저 제시한 방법은 '보지 않겠다'였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잡아먹히고, 내 머리 위 어둠을 드리우는 폭력 속에서 '보지 않는 것'은 완벽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다음 제시한 방법이 바로 '제대로 찍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자극이 자극의 꼬리를 물듯 욕망에 의한 눈이 아니라, 이 폭력을 똑바로 응시하고 제대로 전달해 기억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그렇기에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장비보다 중요한 건 나와 내 가족이 살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이었다. 24시간 CCTV와 선명한 화질의 디지털카메라를 지나 수동 셔터 카메라도 못 담은 '진 재킷'의 진실을 고작 우물 카메라가 담아낼 수 있었던 건 그 신념의 결과물이다.

영화 <놉>은 그간 미국에서 코미디언과 배우,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찍고 담아온 조던 필의 딜레마가 짜낸 농축물이다. 지금껏 카메라 앞과 뒤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이들, 희생당하는지도 모른 채 자극에 끌려다니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폭력적으로 내려찍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폭력을 응시하고야 말겠다, 제대로 찍어내고야 말겠다, 똑바로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영상 매체가 시작된 이래 우리가 기억도 못 하는 희생자들을 기억해내고야 말겠다는 신념이다.


'찍는 사람'과 '담는 사람'의 딜레마는 건강하다. 그들에게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고민하는 것은 평생 쫓아야 할 물음표다. 올바른 신념과 의지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 가장 유연하고 적확한 가치 판단은 그 건강한 유기체 속에서 나온다. '똑바로 보여주기' 위해선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막바지 에메랄드(키키 파머 분)가 마치 '제4의 벽'의 금기를 깨듯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그 카메라 뒤엔 누가 있는지,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어떤 의도와 욕망이 숨겨져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에게) 잡아먹(히)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똑바른 눈'이다.


나는 내일도 말도 안 되는 극악무도와 괴상야릇한 사건들을 마주할 것이다. 나의 똑바른 눈은 늘 건강하게 살아 숨쉬어야 한다. 한순간도 무뎌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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