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놀리아>가 피워낸 우연한 목련
이 영화를 틀기까지 왜 그리도 오래 걸렸을까. 이 영화를 두고 어느 날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보지 않은 나의 인생 영화이고, 내 생애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죽고 싶을 때 나는 이 영화를 틀 것이라고.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정말 우연이었을까.
<매그놀리아>,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건 아마 우연이었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자국처럼 남긴 영화 <시네도키, 뉴욕>. 떠난 뒤에야 들출 수 있었던 이 영화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나온다. 그가 연기한 케이든은 연극 연출가이자, 늘 죽음을 불안해하는 황량한 삶의 주인공. 그가 얼마나 어리석냐 하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불에 타는 집에서 질식해 가는 데도 가만히 있다가 여인이 죽고 나서야 재가 된 집에서 축 늘어진 끌어안고 눈물 흘린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Little Person’. 한때 이 노래에 파묻혀 살았고 묻혀 죽고 싶었다. 이 음악을 작곡한 Jon Brion의 선율을 다 찾아 들었고, 노래를 부른 Deanna Storey에겐 편지를 썼다.
그날도 어둑하게 푸릇한 새벽이었다. 차가운 방에 얼어 있을 때 ‘Little Person’ 끝난 뒤 자동으로 재생된 하나의 영상. 간병인 차림새를 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맺힌 눈물을 닦으며 죽어가는 노인에게 의문의 약물을 투여하는 모습. 곧바로 이어진 장면은 텅 빈 표정을 한 여성이 어두운 거실에서 홀로 코카인을 흡입하는 모습.
그때부터 9명 각자의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읊조리는 4분 30초 동안의 음악. 이 고통은 내가 현명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가사. 그러니 포기하라는 마지막 소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홀린 듯이, 아니 정말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이 빠져들었던 그 영상이 영화 <매그놀리아>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이 인생에서 가장 죽고 싶을 때 이 영화를 재생하리라고. 그것이 새로운 ‘인생 영화’의 정의라고.
이 영화를 봐야겠다 결심한 건 아마도 우연이었다. 죽고 싶지도 않았고, 눈물이 피워낸 작은 곰팡이가 있던 방을 떠난 지도 오래됐다. Deanna Storey 목소리도 더는 전만큼 아프게 들리지 않았다. 단지, 공유되던 취재 일정에 톰 크루즈의 방한 소식을 봤을 뿐이고 멀티 플렉스에선 톰 크루즈 기획전을 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상영작 목록에 <매그놀리아>가 있었던 건 꼭 그래야만 할 필연적 이유가 없었다.
죽음은 삶에서 필연이지만, 대개 우연처럼 찾아온다. 그렇기에 죽고 싶을 때 이 영화를 볼 것이라는 다짐은 어쩌면 우연처럼 다가온 죽음에, 죽기 전에 이 영화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 건 우연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사건과 모든 삶은 뜻하지 않게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모든 인물의 말과 행동은 의도치 않게 서로를 향해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언뜻 우연처럼. 프랭크 맥키(톰 크루즈 분)의 말은 숱한 남성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그중 한 남성이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 분)와 하룻밤을 가진 다음날 그녀를 찾아온 지미 게이터(필립 베이커 홀 분)에게 문을 열어 주었으며, 지미가 과거에 탄생시킨 도니 스미스(윌리엄 H.머시 분)는 자신을 체포하러 왔다가 우연히 목숨을 구해준 경찰 짐 커링(존 C. 라일리 분)에게 어리석은 사랑을 한탄한다. 이 말을 들은 짐은 깨달음을 얻고선 클라우디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간다.
놀라운 건 이 연쇄적인 화학 작용은 영화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 톰 크루즈는 절연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주한 적이 있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어느 날 갑작스레 타계하였다. 영화 속 사건과 삶,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 관객들의 삶과도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영화 밖에 깔려 있는 음악(Wise Up)을 영화 속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겹쳐 부르는 것은 그에 관한 은유일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 흘러나온 음악, Aimee Mann의 ‘One’이 선율을 빌려 말을 건다. ‘1은 가장 외로운 숫자’이고 ‘2도 1만큼 나쁠 수 있다’고. 왜냐하면 2는 하나로 나뉠 때 가장 외로운 숫자가 되니까. 즉 우리는 본래 1처럼 외로운 존재인데, 잠시 둘이 되어 본 적 있었던 우리는 결국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 더 외로운 각각의 존재가 될 것이라 암시한다.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이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내 사랑을 떠나보낸 것이라고. 퀴즈왕을 코앞에 둔 소년이 노래한다.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사랑을 거부한다면 어리석다고. 하늘에서 떨어진 개구리들 앞에서 중년이 고백한다. 나한테는 줄 사랑이 많은데 누구한테 사랑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내 앞에서 영화가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릴 잊지 않았다고.
2주 전 우연한 자리에서 장례지도사를 만난 적 있다. 대화를 나누며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망자를 완전히 떠나보내기 전 그이 앞에서 하는 마지막 말에 관한 것이었다. 살아 있을 때 못 해준 그 무언가에 관한 후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고기반찬을 더 해주지 못한 것, 더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한 것, 마지막 연락을 받지 못한 것, 붙잡지 못한 것, 여행 가지 못한 것, 사랑한다고 더 많이 하지 못한 것. 쉽게 뭐라고 할 말이 없던 내가 조심스레 고작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말이야말로 정말, 거짓이랄 게 없는 오직 진실의 말이네요.”
내가 고른 영화이지만, 간혹 영화가 제 발로 나한테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 영화를 보는 건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린 일련의 과정들은 우연일까. 그것이 우연이라면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Wise Up’ 씬이 자동 재생되던 그날이 더 우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시네도키, 뉴욕>을 들춘 것이 우연일까. 차라리 그 모든 만남과 떠남이 우연인 것이 더 말이 되지 않을까.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출애굽기, 8장 2절>
하늘에서 개구리 비가 떨어진다. 그것도 각자의 삶에서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일들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뉴스를 직업으로 삼으며 가장 확실히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라는 것. 이 세상엔 믿기도 설명하기도 힘든 이상한 일들이 늘 발생한다.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고 그 안의 모든 삶들은 알게 모르게 쉬지 않고 서로 연쇄적인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매그놀리아> 속 인물이 뱉는 말은 그 인물과 전혀 상관없을 법한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고 또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매그놀리아>는, <매그놀리아> 속 사건은, 삶은, 말과 행동은 나와도 연관돼 있다. 내 삶은, 내 말은, 내 행동은, 내 글은 당신에게 가닿는다면 당신에게 연관돼 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들도 그렇다.
자 그렇다면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되고, 이 영화를 비로소 틀게 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기까지 사이에 있던 그 모든 사건들. 내가 이 글을 쓰는 데 영향을 미쳤던 모든 이야기는 우연일까. 영화는 이렇게 답한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연일 수가 없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벌어져야만 했고 그래야만 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용서에 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껏 말했던 ‘우연’이라 칭한 것들이 어쩌면 필연이라면 난 지금 무얼 해야 할까. 무얼 할 수 있을까. 지금껏 후회해 온 것들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 결국 우리는 또 다른 실수로 인한 후회를 행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내 삶을 오직 내 힘으로만 온전히 끌고 갈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지 말 것. 우린 자의와 상관없이 무지한 타인과 끊임없는 얽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만 허무에 빠지지 말고 그럴 수 있는 것에게 사랑과 용서를 행할 것. 우린 자의와 상관없이 무지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는 동안의 거짓은 지양할 것. 우리가 잊을 과거도 우릴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