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과 고통, 그리고 본다는 것
아이의 뇌를 가진 어른의 몸.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의 눈. 벨라 백스터가 눈을 떴다.
굿윈 박사의 궁전에 갇힌 벨라. 벨라는 고통을 본다. 짓궂게 말을 하고 얄미운 표정을 짓고 괴팍한 행동을 한다. 음식을 던지고 접시를 깨며 프림 부인의 찡그린 표정을 본다. 처음 본 고통은 즐겁다.
처음 맛본 고통은 즐겁다.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행위’, ‘뜨거운 뜀박질’. 고통에서 잉태한 쾌락. 벨라는 아픔을 깨달았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쾌락이었으니.
바깥 세상에서 마주친 테라스의 여자. 악기에서 슬픈 음악이 연주되자 명치를 꾹 누르는 듯한 아픔. 심장이 크게 자리를 옮기려는 듯한 고통. 이건 또 무슨 기분이지 싶은 벨라의 표정. 저 여자의 고통이 선율을 타고 온몸에 전이된다. 아프다. 즐겁지 않은 고통. 그리고 이내 내려다본 알렉산드리아의 사람들. 파리의 매음굴 속 사람들. 궤도가 다른 고통. 가여운 것들이 즐비한 이상한 세계. 벨라 백스터가 눈을 떴다. 아픔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새로이 눈을 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에요.”
ㅡ영화 <시>에서 시 선생의 말.
영화 <시>에서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세상을 새롭게 관찰한다. 커다란 나무, 빨간 사과, 설거지통의 그릇들, 팬지꽃이 있는 작은 화분. 바람, 햇살, 아침. 아름다운 눈으로 그 모든 걸 보듬듯이 자세히 관찰한다. 그러나 미자가 결국 마주한 것은 고통이었다.
‘미자는 시 선생의 말을 따라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느끼려 했으나 그가 본 것은 고통이었다. 아름다움을 보려 했으나 고통을 보아버렸다. 미자가 손자가 다니는 학교의 실습실을 기웃거린 후 운동장에서 시 같지 않은 시를 끄적였을 때와 손자의 범행을 알고 난 후에 같은 공간을 바라보고 난 후 느끼는 시상의 범위는 전혀 다른 것이다. 미자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원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시인에의 꿈은 황혼기에 마침내 달성할 기회를 얻었으나 시를 쓰기 위해 미자가 더 깊게 보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가 얻는 것은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이다.’ (29p, 『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김영진)
‘미자는 자기 손자가 연루된 소녀의 죽음에 죄책감과 연민과 공감을 갖고 접근하려 하나 그 공감의 위치는 추락을 감내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32p, 『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김영진)
‘시 창작 수업에서 강사인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두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보는 일이며 바로 그때서야 시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진짜로 보는 일과의 사투다.’ (139p, 『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정지혜)
벨라 백스터가 고통에 처음 눈을 뜨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여정. 그것이 쾌락인지, 감동인지, 연민인지, 슬픔인지 분류하고 여과하는 과정. 벨라가 눈을 뜬 곳은 거칠고 더러우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아픔의 세계였으니. 그리고 벨라 스터는 그것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뇌와 몸의 불균형한 성장은 마침내 조율되었다.
쾌락과 감동, 그리고 연민에서 수반하는 고통. 우리가 한 궤도를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픔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다 아프기에. 아픔을 모르는 것들은 그래서 잔혹하다.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뀐다며 흡족한 지금에 냉소하는 것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자꾸만 마르고 마르던 눈물을 한 방울씩 뭉치어 겨우 바뀌어 왔는데.
아픔의 시선을 모르는 것들은 그래서 가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