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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Apr 08. 2024

그 모든 것이 당장 휩쓸려 버리더라도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슴의 섬' 안마도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2017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전남 영광군의 외딴섬, 안마도. 이곳엔 사슴 1000마리도 산다. 차도를 뛰어다니고, 농사지은 고구마를 씹어먹고, 묘도 절단내는 사슴들. 그들은 숲과 풀을 헤집으며 섬을 민둥산처럼 만들었고, 철조망 쳐 놓은 곳엔 사슴뿔이 무더기로 잘려져 있다.


약 40년 전 녹용을 채취해 팔려던 축산업자들이 데려온 사슴 10여 마리. 하지만 어느 날 사슴을 유기하고는 홀연히 사라진 사람들. 사슴은 사슴의 방식대로 삶의 터전을 꾸려 개체 수를 늘렸다.


주민들의 하소연. 몇 년째 농사를 망쳤고, 음식물 쓰레기를 터뜨려 놓으며, 밤마다 어둠 속 번쩍이는 눈에 깜짝 놀라면 괴성을 내며 달아난다고. 전염병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축산법상 가축으로 분류돼 인간이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사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주민들 과반수 이상은 총으로 쏴 포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부는 사슴을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할지 논의 중이다. 유해 야생동물은 수렵할 수 있으니까.


위 내용은 올 초 보도한 기획 기사다. 착잡했다. 주민들 피해를 눈으로 보니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움, 아비의 묘를 파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작물은 내 생계이자 내 새끼일진대 그걸 파먹고.


하지만 사슴을 ‘악’으로 전하고 싶지 않았다. 주민들도 말한다. 개체 수가 이보다 적었을 땐 대부분 신기해했고 좋아했다고. 누군가는 먹이를 주기도 했고, 사슴이 사람을 먼저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먹이가 없어 조그마한 인근 섬에서 무리 지어 헤엄쳐 오는 사슴이 무슨 악의가 있겠는가.


조명할 것은 당연히 책임지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동물의 연한 뿔을 잘라 돈벌이하려다 쓸모 없어지니 버리고 도망친 그 사람들. 누구인지 형체도 모를 사람들을 뒤로한 채 죽임당할지 말지 내 뜻 하나 없는, 사슴은 그럼 어디로 갈까.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안마도를 떠올렸다. 자연은 무엇 하나 책임질 수 없다. 자연은 선과 악을, 삶과 죽음을, 기쁨과 슬픔을, 평화와 폭력을, 사랑과 전쟁을 모른다.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연. 선의와 악의를 가진 존재는 선의와 악의를 구분해 내는 인간뿐.


안마도와 관련하여 인간사 법칙으로 사태의 매듭을 지어볼까. 40년 전 사슴을 유기한 이들을 끝끝내 찾아내어 처벌하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보상시킨 뒤 사슴은 더 나은 생태계로 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일 테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럴 일은 희박하다. 200여 명의 주민들이 섬에서 사라질 때까지 피해가 축적되거나, 사슴이 마구잡이 총살당하거나. 인간사에서 그럴듯한 대안은 언제나 사후에 나오기에, 앞으로 가축을 유기하는 소유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결말일 테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상류에 사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습니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더러운 물을 전부 하류에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영화는 상류의 의무와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이 자연이 그렇듯, 인간 삶도 어딘가의 상류는 어딘가의 하류가 되기도, 또 어딘가의 하류는 어딘가의 상류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모든 건 인간 탓이야’라는 것은 무력한 돌림 노래.


물론 인간의 관점으론 무심한 자연이 오히려 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앞에서 인간은 무력했고, 튀르키예를 강타한 규모 7.8 지진은 히로시마 원폭 32개와 맞먹는단다. 나는 어느 날 바다에 휩쓸려 사라질 수도, 강풍에 날아온 간판에 머리를 맞아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 관점에서 그 모든 것은 그만의 섭리이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인간이 자연과 완벽히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


오만을 찢어발기는 균열, 오해에도 해명 따위 관심 없는 무념. 그 어떤 수렵꾼이 쏜 총알에 사슴이 빗맞았고 이에 따라 공격성이 가장 무고해 보이는 사람을 죽인 건 자연의 법칙일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초래할지 예상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전형적인 패턴이 문제다.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서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인간의 신체와 정신 또한 파괴된다.”
(하마구치 류스케)

인간은 자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그러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악의를 거두어야 한다. 이기적 이타심. 상류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살아도 또 다른 상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폐수를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인간이 자연과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잘 살기 위해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역설. 영화 속에서 도시 사람들이 오기 전 산골 마을 주민들이 평화로워 보였던 이유는 일찌감치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곳의 주인은 본인들이 아니란 사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화 불가능한 자연 앞에서 대화 가능한 인간들의 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당장 그 모든 것을 덮치는 무언가에 전부 휩쓸려버리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완전한 선의가 아니더라도.

다시 안마도를 떠올린다. 40여 년 전 이곳에 사슴을 데려온 자들은 누구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그들도 어딘가에서 하류 인생을 살고 있을까. 자연의 무심한 표정에 떨고 있는가. 아니면 자취를 감춘 채 침묵하는가. 사실 악의는 아니었나.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오프닝 시퀀스의 숲이 아름다운가.

엔딩 시퀀스의 숲이 섬뜩한가.

숲은 말 없이 우릴 품고 덮친다.

악의도 선의도 없이.


#영화 #악은존재하지않는다 #하마구치류스케 #EvilDoesNotExist #悪は存在しない #濱口竜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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