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볼컴(W. Bolcom), “우아한 유령Graceful Ghost”
그리 어리지도 않던 대학교 3학년 시절의 일요일 아침, 학교 매점 2층의 피아노에서 바흐를 연습하다 “나는 연봉을 100만원 더 올리느니 바흐의 변주곡 하나를 더 익히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홀로 뿌듯해한 적이 있다. 언젠가는 바닷가가 보이는 집에 피아노를 들여서 소금 냄새를 맡으면서 바흐를 연습하겠다고. 삶에 피아노를 녹여 늙어가겠다고. 그것은 법열의 시간이었고, 지혜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기보단 무지의 시간이었고, 어리석음의 시간이었다. 법열에 사로잡혀 음악의 기쁨을 인생의 목표로 둘 정도로 순진했고, 오른 연봉 100만원이 피아노와 피아노를 놓을 부동산을 담보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지혜롭지 못했단 얘기다. 아무래도 밤새 술마시고 피아노를 치러 간 피곤한 두뇌에서 나온 생각이니 그렇게 어리석을 수밖에.
내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거주 공간에 피아노를 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내 집의 필수 조건은 공간을 소리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피커랑 피아노를 사서 노래도 틀고 연주도 해야지! 그러나 갓 독립해 사회인이 된 주제에 피아노란 꿈은 사치스럽기만 했다.
졸업하고 처음 살았던 방은 모든 모서리가 직각으로 떨어지지 않는 엉성하게 좁은 공간이었다. 침대는 관보다 좁았다. 아직 관에 누워본 일이 없긴 한데, 적어도 관에는 사람 발목을 구겨서 넣진 않을 거 아닌가? 게다가 겨울에는 입김이 나고 손가락이 구부러질 정도로 추웠고, 이런 방에서 피아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 방인 <젤존하우스 2차> 원룸은 그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좁아서 방 중간에 서서 팔을 벌린 채 한 바퀴를 돌면 양손가락이 벽에 닿았다. 방음 문제는 외려 심각해져서(전에 살던 방에서는 다들 외풍으로 얼어 죽었을 테니 생활소음을 못냈겠지, 아마) 매일 아침 옆방 인간의 카톡 알림 진동으로 잠을 깰 수 있었다. 이런 찰스 디킨스 스타일의 주거 환경에서는 악기 연주는 커녕, 숨을 죽인 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누릴 수 있는 음악 생활의 전부였다.
그렇게 3년 정도를 무음악으로 살고 세 번째로 이사한 방에서 마침내 피아노를 들이기로 결심했다. 아니, 피아노를 들일 수 있는 크기의 방으로 이사갔다고 해야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곳도 좁긴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피아노를 향한 욕망은 생존 조건에 가까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방넓이를 가늠해 본 후 나는 책상을 빼고 피아노를 넣기로 결심했다. 읽고 쓰는 게 업인 주제에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어폰을 쓸 수 있는 디지털 피아노가 불완전한 타협점이었다.
기타가 떠돌이의 동료라면, 피아노는 정주민의 가구다. 피아노라는 가구를 들이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악기를 수용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용산 아이파크몰에 전시된 다양한 피아노를 쳐보면서, 나는 2년마다 원룸을 떠도는 팔자에 피아노는 역시 사치라는 점을 다시금 느꼈다. 심지어 남한 수도권처럼 과밀한 주거 형태에서 어쿠스틱 피아노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퇴근하고 저녁 먹은 후에 연습을 시작한다면 10분 내로 윗집, 앞집, 옆집, 아랫집, 대각선집의 불평을 들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고른 것이 이어폰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디지털 피아노였다. 이어폰을 끼면 나무 말이 달리는 듯한 따가닥따가닥 건반 소리만 남는 피아노.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주제에, 역사의 장난으로 이제는 소리를 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 악기.
좁은 문틈으로 상자를 밀어넣느라 고생한 후, 피아노가 설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사님께 경기는 어떻냐고 물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코로나 때문인지 피아노는 오히려 잘 나가는 느낌이에요. 사기 전에 그렇게 열심히 쳐보았는데도 디지털 피아노와의 첫 만남은 어색했다. 건반의 느낌은 아무래도 학원의 어쿠스틱 피아노와 달랐다. 더욱 낯선 점은 이 기계의 개성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처럼, 모든 피아노도 개성을 가진다. 호산나 피아노학원 지하의 영창 그랜드가 낮은 솔에서 특유의 배음을 내고, 야마하 그랜드는 무거운 건반만큼이나 텁텁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덩치만큼의 물리적 실체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피아노는 피아노보다 카멜레온에 가까웠다. 건반을 누르는 느낌은 같은데, 버튼만 누르면 하프시코드부터 전자 올갠까지 수십 가지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심지어는 건반의 무게도 조절할 수 있다. 들려주는 소리와 연결된 물리적 실체가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가지인 것이다. 그 간극이 생경하여 나는 세상의 디지털 피아노들이 모두 우아한 유령처럼 피아노의 이데아를 부유하리라 상상했다. 허상같지만 아름다운 소리. 내가 어떻게 건반을 치든, 이 친구는 이미 아름답게 완성된, 녹음된 소리를 들려줄테니. 어쿠스틱 피아노의 감촉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겠지만, 나는 집에서도 피아노를 칠 수 있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거금을 들여 산 악기라 혹여나 금방 질리거나 먼지 쌓인 신세로 두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디지털 피아노를 멀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날로그가 아니라는 이유로 멀리하기에 디지털 피아노의 편리함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15분을 걸어 피아노 학원을 가지 않아도, 야근에 지친 파절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자다가도 떠오른 곡의 코드를 짚어볼 수 있다(몇 번 그랬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 코로나 대유행이었다. 하릴 없이 집에 갇혀있어야 했던 몇 백번의 낮과 밤 동안 디지털 피아노는 소중한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 기간 동안 6평도 안되는 원룸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롯이 피아노 덕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피아노는 정말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 감정을 느낀 건 디지털 피아노만의 건반 감촉과 소리 차이를 느끼던 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끓어가는 된장찌개의 구린내를 맡으며 쇼팽을 연습하던 저녁, 빨래를 널 자리가 없어 그새 쌓인 흰 먼지를 닦은 후 팬티를 피아노 위에 널고 에어컨을 돌리던 어느 장마철 오후, 그리고 방바닥을 닦다가 발에서 나는 땀 때문에 마침내 녹이 슬어 윤기를 잃은 오른쪽 댐퍼 페달을 발견한 날이었다. 내가 우아한 유령이라 생각한 디지털 피아노는 어느 순간 녹슨 페달을 가지고 먼지에 덮인 채, 된장찌개 냄새를 내며 내 방 한켠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내가 찾기 힘들 거라 생각한 그 자신의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내 방에서 내 피아노를 다시금 발견한 순간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하거나 멋지다기보다는,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내 생활의 궤에 피아노가 안착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것이구나, 피아노가 내 삶의 일부가 된다는 건. 음악이 업이 아니라도 삶에 조금의 음악을 녹일 수 있는 거였구나.
사소한 뿌듯함을 느끼며 나는 된장찌개를 먹고, 팬티를 개고, 페달에 쌓인 먼지를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