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군기반장 삐삐의 정체
이사를 오기 전부터 빌라 집 앞에 있는 좁은 주차 공간엔 회색 스타렉스가 매일밤 주차돼 있었다. 회색 스타렉스는 우리가 이사온 후 빌라 앞 주차장을 임시로 이용하려고 하나 기꺼이 주차 공간을 우리에게 내어줬다. 그리고는 골목 이쪽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메뚜기 주차를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 스타렉스의 주인이 바로 이 빌라에 오래 산 집 top2 안에 드는 102호 반장님의 차라는 것을.
50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102호 반장님은 참 사려깊은 분이었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주차 공간을 양보해 준 분도, 빌라 관리비를 걷어 이런저런 불편한 점을 해결해 준 분도 102호 반장님이다. 반장님은 어디선가 우리 빌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와 해결을 해주셨으며 다른 이웃과 문제가 생기면 지혜롭게 의견을 조율해주셨다. 양쪽 귀 뒤로 쭉 뻗은 머리칼이 삐삐를 닮아 우리는 그를 삐삐 반장님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마치 복학생을 따르는 신입생과 같이 반장님을 잘 따랐다.
반전은 이사온 후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일어났다. 이사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을 예쁘게 인테리어해주신 인테리어업체 사장님과 감사 통화를 하는데, 사장님이 뜻밖의 에피소드를 알려주신 것이다.
사실 내가 한참 공사할 때 102호에서 엄청난 컴플레인이 있었어요. 어떤 아저씨가 대낮에 술이 엄청 취해서 집 앞에 쫓아와서는 소리 소리를 지르더라니까. 거의 나를 때릴 정도였어요. 내가 음료수 한 박스 사서 인사를 갔더니 그제야 좀 누그러지시더라고. 이후에도 가끔 시끄럽다고 쫓아올라왔어요. 와, 진짜 얼마나 화를 내는지 골때렸어요.
아.. 정말요? 저희가 미리 빌라 곳곳에 안내문도 붙이고 집집마다 선물도 사가고 양해 구하는 인사도 드렸었는데요.. 중간중간 불편한 것 없는지 여쭤볼 땐 다들 괜찮다고 해주셨는데..
몰라 나는. 아무튼 그랬다고요. 내가 그렇게 고생했었다고 그냥 말해주는거예요.
102호에 사는 아저씨? 삐삐였다. 우리가 뽑은 최고의 배려왕 삐삐반장님. 그 얘길 듣고 생각해보니, 삐삐반장님은 특정 요일, 그러니까 목요일 오전엔 차를 집 앞에 대 놓고 느지막히 일어나시는 듯 했다. 어쩔 땐 대낮에 차 좀 빼달라고 전화를 드렸더니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지금은 술이 아직 깨지 않아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며 아내 분을 부르셨었다. 그러니까 인테리어 사장님에게 화를 낸 사람은 틀림없이 삐삐다.
반전은 계속 이어졌다. 동네 전체가 재개발로 시끄러운 가운데, 단체채팅방에서 한 공격적인 주민의 대화에 더 공격적으로 대응한 사람의 아이디가 바로 우리빌라 102호였던 것.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 가만 안있습니다. 라는 채팅글에 아 예 그러시던지요. ^^ 일단 나랑 싸우려면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 ^^ 라며 비꼬는 사람도 틀림없이 우리 빌라 102호에 살고 있는 배려왕 삐삐였다.
그러니까 믿기지 않지만 삐삐반장님은 본의 아니게 우리 부부에게 두얼굴인 셈이다.
하지만 유모차 안에 탄 아기에게 행여나 담배냄새가 밸까 싶어 저 멀리에서 인사하면서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고, 강원도에서 농사지어 가져왔다는 옥수수를 너댓개나 집에 보내주시고, 주차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주시고, 빌라에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처리해주시는 우리 삐삐 반장님에게 공격성이란 단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삐삐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 부부에게 보여지는 삐삐의 모습은 한없이 선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삐삐의 모습은 놀라울만큼 공격적이다.
그 분이 무슨 일을 해왔고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어떤 얼굴에 더 가까운 분인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두 얼굴 모두 반장님의 참모습이고 적어도 우리에겐 따뜻한 모습만을 보여주셨으니, 부정적인 표현들은 쏙 빼고 카리스마 군기반장님 쯤으로 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