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시작
제목이 거창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미국변호사, 됐다.
꿈의 시작
이 꿈이 시작된 건 내가 서른살 즈음이었을 무렵이다.
당시 나는 언론고시가 되려다 안 되고 되려다 또 안 되어 좌절을 겪던 중이었다. 만약 (당시 기준) 평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뭘 하고 살아야지? 라며 불안한 고민을 하다, 불현듯 미국 변호사를 꿈꿔보게 됐다.
나는 태생적으로 사람과 세상에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초중고대를 나온 내츄럴 본 한국인이지만, 언젠가는 글로벌 무대에서 흥미로운 일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히 사람과 사건,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하여 궁극적으로는 더 밝고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언론인을 꿈꿨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미국 변호사라는 진로는 그런 나의 태생적인 욕구를 어느정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이 아닌 보다 넓은 글로벌 무대에서 사람과 사건을 다루며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 업무 경험으로 각기 충분히 시키는대로 하기보단 내 주관과 가치관을 업무에 녹여낼 수 있는 일. 지원자의 절대적인 나이가 중요하지 않고, 나이나 업력이 많다해도 다양한 분야의 업무 경험을 접목해 새로운 커리어 영역을 개발해낼 수 있는 일. 이 정도면 언론인보다 나은 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잿빛이던 내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의 비전을 채울 또다른 길을 발견했으니까. 나는 원래부터 머리가 비상하게 좋거나 공부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이라도 꾸역꾸역 꾸준히 해내는 재주는 있다. 긴 고생의 기간 끝에 맞이하는 달콤한 성취를 좋아하고, 힘든 과정 속에서 발전하는 나를 보는 것이 즐겁다. 그렇다면 지금은 언론인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미국"(나는 내츄럴 본 한국인이니까) "변호사"(나는 법과 관련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도 눈 딱 감고 꾸준히 공부해 이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모아둔 돈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또한 괜찮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나는 꾸준히 마음 속 꿈을 빚어갔다. 이직, 결혼이라는 굵직굵직한 삶의 이벤트를 지나오면서도 꿈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그 꿈이 2025년 늦가을,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하고 싶은 거니까, 해봐
어떤 일을 시작할 땐 가능성과 기대효과를 꼼꼼히 살펴보는 편이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은 확인했다. 나는 나의 가능성을(정확히 말하면 떨어지더라도 될 때까지 밀어부칠 정신력과 끈기를) 믿었다. 문제는 기대효과였다.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미국에서 일하려면 비자와 언어 문제가 매끄럽게 해결되어야 하지만 이는 내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한국에서 일하는 건 미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수월하겠지만 이 또한 그 문이 그리 넓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 변호사의 입지나 소셜 포지션은 한국 변호사 아래일 가능성이 크니까.
가장 좋은 선택지는 한국 변호사가 업무 경력을 충분히 쌓은 후 연수 차원에서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다. 이 경우 그 변호사의 업무 지평이 확연히 넓어질 수 있다고, 그래서 한국 변호사는 많이들 미국에 갔다 온다고, 한국 사법시험에 비하면 미국 변호사 시험 난이도가 훨씬 낮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쉽게 패스하곤 한다고, 앞서 이 길을 지난 수많은 온라인 선배들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법무팀 경력이 있거나 법대를 나온 분들 또한 미국 변호사 자격증 취득 시 어느정도 날개를 달 수 있단다. 하지만 난? 전혀 다른 영역을 전공했고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난? 영어가 원어민 수준도 아니고 아기도 낳을 예정인 난? 본격적인 공부 모드로 진입하기 전 이 불안한 물음표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발목을 계속 붙잡고 늘어졌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는 걱정감옥에 갇혀있었다. 남편이 한마디 툭 던지기 전까진.
"오랜 꿈이었으니까 한 번 해봐. 붙고 나서 뭐할지에 대한 고민은 일단 붙으면 그 때 또 같이 해보자구."
어디서 일하든, 일단 자격증이 있으면 없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것이다.
미래야 우리가 우리 스타일대로 개척해나가면 된다.
미국변호사 해서 뭐해? 너 지금도 커리어 충분히 좋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자격증을 얻고 나서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아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즐거웠으면 한다.
남편은 멋있는 말을 잔뜩 던지고는 한국에서 다닐 수 있는 로스쿨이나 학원 정보를 빠르게 찾아보기 시작했다. T이자 O형인 남편은 참 한결같다. 우주로 가는 내 고민 지점을 딱 잡아서 바로 이 곳으로 돌려 보낸다. 이 날도 그는 내 걱정모드를 부드럽게 끊어낸 뒤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주었다. 말하자면 달리기 전부터 걱정하는 걱정인형을 보조석에 앉힌 다음, 안전벨트를 채우고, 내비게이션을 세팅해, 천천히 엑셀을 밟는 셈. 결국 남편은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는 과정을 찾아냈고 지원서를 작성하거나 공부 자료를 구매하는 일도 자기 일처럼 도왔다.
그 덕에 나는 눈 감았다 떠보니 로스쿨 교실에 앉아있었다.
종종 생각한다. 이 사람의 자신감 있는 추진력 때문에 내가 끝을 볼 수 있었다고. 내 꿈을 지지해주는 그의 추진력이 가끔은 어마무시한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그 부담과 스트레스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않게가 아니다, "못하게"가 정확하다) 했다. 비싼 학비와 육아의 부담을 거리낌없이 맡아준 고마운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수십 번도 더 포기했다.
단단한 추진력의 저변엔 나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있을 터. 나는 그 사랑과 신뢰에 악착같이 보답하고 싶었다.
고생 많았어
합격 메일은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전,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밤 늦게 왔다.
아기를 재우고 함께 메일을 열어 합격점 이상의 점수를 확인했을 때, 우리는 번쩍 일어나 부둥켜 안고 말없이 한 10분 요상한 춤을 춰댔다.
가장 먼저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번에도 떨어졌나 했는데(난 N수생이다) 드디어 됐구나! 정말정말 축하한다!"라는 말을 듣고, 한참 기쁜 소식을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조금 후 우리 아빠로부터 내가 아닌 남편에게 따로 전화가 왔다.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얼마나 힘들었어? 응원해준 덕분에 쟤가 끝까지 왔다. 고맙다."
통화가 종료된 후 나는 남편에게 왜 아빠는 딸이 아닌 자기에게 전화를 하셨지, 부끄러워서 그러시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빠가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를 향한 축하는 남편이 수고했기에 가능했으니까.
이후에도 우리 부모님은 계속해서 사위에게 고마운 마음과 축하의 마음을 듬뿍 보냈다. 그런 부모님과 그런 남편이 있어 나는 결국 한국에서 미국 변호사가 됐다.
개척의 영역
이제 진짜 붙었으니 미뤄뒀던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남편, 우리 이제 진짜 고민해야 할 때가 왔어.
그래. 근데 그건 이제.. 우리 MPRE 보고 나서 생각해보자.
그러네. 아직 가볍지만 거쳐야 하는 MPRE 윤리 시험이 하나 남아있다. 남편은 다시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MPRE 시험 장소와 일시를 부지런히 찾기 시작한다. 이 시험까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펼칠 것이다. 물론 다시 개척해야 하긴 하는데, 그것도 큰 인생 숙제가 될 텐데, 그래도 스트레스보단 기분 좋은 긴장감이 깃든다.
어떤 방향이든 괜찮다. 설령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 해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뤘으니까. 지금이 이런데, 앞으로도 어떤 미래든 괜찮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