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Shoplifters, 2018년 作)
문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비좁은 집 안은 복작대던 평소와는 달리 모처럼 고요하다. 둘만 남아 식사를 하던 오사무(릴리 프랑키)와 그의 부인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서로에게 야릇한 제스처를 주고받던 끝에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한동안 자의, 타의적으로 플라토닉 사랑만 나누던 부부의 사랑이 에로스로 넘어가는 순간. 정신의 공유에서 육체의 결합으로의 완성. 그 여운을 만끽하던 즈음 폭우를 뚫고 쇼타(죠 카이리)와 유리(사사키 미유)가 집으로 뛰어들어온다. 부부의 체액의 교환이 이루어진 직후 난입하는 아이들. 마치 양수를 뒤집어쓴 듯 비에 쫄딱 젖은 아이들. 섹스와 잉태 그리고 출산까지의 과정을 단번에 결합시키는 편집의 봉합. 두 아이의 자녀화.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된 것일까?
나에게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의 4번째 만남이다(연대순으로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리고 <어느 가족>). 국제적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감독의 영화를, 이미 자신의 필모를 20편 이상의 영화로 채운 감독의 영화를 단 4편 남짓 마주한 뒤에 그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것은 무례하고 무리하며 무지한 일일 것이다. 하면 안 되는 일임을 알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이렇게 이해해주면 어떠할까? 앞으로 써 내려갈 본문은 위의 언급한 4편에만 국한된 얘기라고. 그러니까 다른 영화를 예시로 든 반박은 이 글을 무력화시키기엔 무용하다고.
세 편의 그의 전작들에서 큰 줄기를 이루던, 자잘한 잔가지에 속해있던 고레에다의 영화는 늘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무탈해 보이는 가족의 감춰진 환부를 들춰본다거나, 해체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한 가족을 조명한다거나 그러니까 흔히 학습화된 화목하고 단란한 전형적인 모습에서 빗겨있는 형태의 가족이 늘 그의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본편도 물론 가족 이야기이다. 그런데 앞선 3편과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어떤 균열이 일었든 간에 혈(血)이라는 연결고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의 가족의 양태가 이번에는 무혈(無血)로 엮여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오로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본인이 창조해낸 가족. 여러 가족들을 조명한 끝에 도달한 <어느 가족>. 그의 가족 이야기는 어느덧 마침표에 다다른 것일까?
기존 가족구조에 대한 환멸은 여전하다. 유리의 부모는 딸을 양육함에 있어 폭력과 방관으로 일관하는데 원치 않는 임신, 헤어짐과 만남을 무분별하게 반복하는 행위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제기된다. 하츠에(키키 키린)에서 노부요 그리고 유리로 이어지는 3세대에 걸친 여성들은 모두 혼인이라는 제도에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하츠에와 노부요는 남편과의 불화가 있었고, 유리는 그녀의 부모님의 문제로 외톨이가 되었다). 무분별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면 섹스다. 섹스 자체는 죄가 없다. 본편에서 조준하는 과녁은 섹스자체가 아닌 그것의 쾌락적 측면의 극악적 결과인 성매매다. 하츠에와 노부요, 아키(마츠오카 마유)는 '업소'라는 단어로 유대를 맺는다(하츠에와 아키는 유사 성행위를 언급하며 식사를 즐긴다. 노부요와 아키는 업소에서 만난 남자들에 대한 농을 즐긴다). 그래서일까?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바타 부부에게 감독은 잉태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21세기 일본의 가정 붕괴의 동인은 무분별한 남녀관계로부터 시작된다라는 구태의연한 한 문장으로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너무 쉽고 편한 길을 선택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 구태의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이유. 구태의연하다는 형용사는 말 그대로 이 명제가 재차 거론되었던 것임을 방증한다. 재차 거론된 명제라는 의미는 이 문제가 이미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었고 이질감이 휘발되어 어느덧 삶의 일부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명제는 아무리 뻔하다고 말해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실'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절도를 하던 쇼타가 검거되면서 어느 가족은 사상누각임이 드러나며 사실상 붕괴한다. 본래 속해있던 가족과의 실패의 결과물들인 이들이 구축한 새로운 가족의 재분열. 구세계와 신세계의 동시 실패.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이 비가역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아이들이 어쨌든 본인들의 일말의 자의로 합류하게 된 가족마저 맨살이 드러나게 된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진퇴양난 속 아이들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여기서 감독은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마침표가 될 수 없음을 시인한다. 그의 가족은 도돌이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찰과의 대면에서 낳았다고 모두 엄마가 될 수 있느냐는 노부요의 반문에 검찰은 그래도 낳아야 엄마가 된다고 대답한다. 노부요는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를 정면에서 직시한 카메라는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확인하지만 진심은 진실을 전복시키지 못한다. 전작들의 가족에 대한 다각적 고찰을 통해 새로운 가족 창조라는 정반합의 결론에 도달하려고 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변증법은 실패했다. 피(血), 정(情) 그리고 돈. 어느 것으로 탄생한 가족이라 한들 단 한 발자국 나아가지 못하고 좌초되어 도돌이표 속에서 무한히 탄생과 죽음을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오사무도 검사와 대면한다. 검사는 오사무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고 비난한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도둑질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오사무는 도덕률이라는 것이 없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아니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마도)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을 검사에게 오사무를 비난할 자격이 주어질 수 있을까? 노부요와는 대조적으로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직시하지 못하고 비스듬히 바라본다. 무능력한 남자에 대한 환멸로 보이던 이 프레임이 미안함에 눈을 마주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왜일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의 불평등에서부터 <어느 가족>의 무력감은 시작된다.
★★★☆ (별 3개 반)
마침표도 쉼표도 될 수 없는 도돌이표 가족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