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로부터
고 김기홍 님을 애도하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왜 커피포트 근처에 서 있는 물 한 잔을 슬퍼하고 있을까? 진짜 주전자와 물잔은 결코, 그 물건들이 예전에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내게 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vedt, 샤르댕에 관한 에세이 <빨간색 크레용을 든 남자 The Man with the red crayon> 중에서
시리 허스트베트의 장편 소설 《내가 사랑했던 것》의 주인공 레오 허츠버그는 4월의 어느 날 오후 대학원 정물화 세미나에서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1699.11.2~1779.12.6, 프랑스 파리)에 관한 강의를 하다 그의 그림 <물잔과 커피포트 A Glass of Water and a Coffee-pot, 1760>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사고로 잃은 어린 아들 맷이 떠올라 강의 중 갑자기 눈물이 북받친 레오는 학생들 앞에서 샤르댕의 물잔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물이 부재의 표식인 것처럼 보여."
맷의 침대로 수백 잔의 물을 갖다 주었고 그 애가 죽은 후로도 많이 마셨다. 나는 밤에 곁에 물잔을 두고 자는 사람이다. 진짜 물컵을 보면서는 한 번도 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230년 전 그려진 물컵의 이미지는 나를 붙잡고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 속으로 돌연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내던져 버렸던 것이다.
시리 허스트베트, 《내가 사랑했던 것》, 뮤진트리, 209p
정물화를 그릴 때 각각의 사물에는 바로 곁에 있는 다른 사물들의 빛깔을 조금씩 칠해야 한다고 배웠었다. 실제 그러하듯. 그리는 입장이 아니어도 정물화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거역할 수 없는 반영과 투영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한때는 무형으로 느껴졌던 사랑과 상실의 사건들이 단단하고 섬세한 색채의 몸을 가지고 마중 나오는 순간을. 정물을 통해 샤르댕은 보이지 않는 의식과 공기 속에만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사랑의 연대年代를 물질로 재현해낸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디로도 시간을 서둘러 건너지 않고 정물과 정물 사이, 정물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허물기를 반복하며 각자의 연대에 묻힌 죽음과 소외와 상실을 길어 올린다. 도피는 아니다. 소설 속 레오가 말한 것처럼, 샤르댕의 물잔은 아직 살아 있다는 자각 속으로 우리를 던져 버린다. 잔인한 파멸이나 연이은 상처에 대한 경고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근처, 우리의 바깥,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 위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색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기막힌 위로와 믿기 힘든 증거 앞에 내던져진다.
나는 샤르댕의 작품에서 사랑을 언급하는 것이 신비롭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터치 touch는 모든 인간의 삶의 중심에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첫 경험이다. 뇌졸중이라는 샤르댕의 육체성은 위로의 어루만짐과 손길을 모두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런 붓의 손길이, 샤르댕 작품에선 식탁보가 식탁에게 가지는 애정을 느낀다는 프루스트 말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 확신한다.
시리 허스트베트, <빨간색 크레용을 든 남자 The Man with the red crayon>
다시 본 샤르댕의 물잔 앞에서 나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이기도 했고 그녀이기도 했고 어쩌면 둘 다였거나 둘 다 아니었을 그이는 샤르댕의 물잔처럼 맑고 은은한 빛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가진 그 빛이 고귀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정을 지녔던 친구의 고통과 죽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며 당신만은 꼭 죽지 말고 살아내달라 얘기할 땐, 슬픔의 잿빛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너무나 투명해서 자기 안에 뜬 시시한 먼지들마저 감추지 못할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는 샤르댕의 물잔처럼 곁을 비추었다. 친분도 없는 죽은 이와 그림 속 정물이 되어 우정을 주고받는 상상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믿음에 가깝겠지만, 웬일인지 이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 이따금씩 그가 나를 저 물잔 앞으로 불러낼 거라는 확신이 든다. 돌이킬 수 없는 부재의 표식이자 애정 어린 반영과 감추지 말아야 할 포용의 빛 앞으로.
어느 날 한 아티스트가 색칠을 깨끗하고 완벽하게 하기 위해 한 모든 작업에 대해 길게 얘기하고 있었다. 샤르댕은 아는 거라곤 냉정하고 세심한 기술자가 되는 것 밖엔 없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데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누가 당신에게 페인팅이 색깔로 끝나는 거라고 합디까?" "그럼 뭘로 끝나는데요?" 또 다른 아티스트가 놀라 물었다. "색은 쓰이는 거지요. 그림은 감정으로 끝이 납니다."
프랑스 조각가 샤를 니콜라 코샹 Charles-Nicolai Cochin이 쓴 샤르댕의 삶에 관한 에세이에서
*참고 서적
시리 허스트베트, 《내가 사랑했던 것》, 뮤진트리, 2013
시리 허스트베트, 《Mysteries of the rectangle, meditations on painting》, Prinston architectural press, 2005
*참고 사이트
https://alchetron.com/Jean-Baptiste-Simeon-Chardin
https://intempus.tistory.com/238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92&cid=58862&categoryId=58878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