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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방전 Mar 01. 2021

샤르댕의 물잔

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로부터



고 김기홍 님을 애도하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왜 커피포트 근처에 서 있는 물 한 잔을 슬퍼하고 있을까? 진짜 주전자와 물잔은 결코, 그 물건들이 예전에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내게 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vedt, 샤르댕에 관한 에세이 <빨간색 크레용을 든 남자 The Man with the red crayon> 중에서






시리 허스트베트의 장편 소설 내가 사랑했던 것의 주인공 레오 허츠버그는 4월의 어느 날 오후 대학원 정물화 세미나에서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1699.11.2~1779.12.6, 프랑스 파리)에 관한 강의를 하다 그의 그림 <물잔과 커피포트 A Glass of Water and a Coffee-pot, 1760>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사고로 잃은 어린 아들 맷이 떠올라 강의 중 갑자기 눈물이 북받친 레오는 학생들 앞에서 샤르댕의 물잔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물이 부재의 표식인 것처럼 보여."


맷의 침대로 수백 잔의 물을 갖다 주었고 그 애가 죽은 후로도 많이 마셨다. 나는 밤에 곁에 물잔을 두고 자는 사람이다. 진짜 물컵을 보면서는 한 번도 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230년 전 그려진 물컵의 이미지는 나를 붙잡고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 속으로 돌연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내던져 버렸던 것이다.

시리 허스트베트, 《내가 사랑했던 것》, 뮤진트리, 209p



장 시메옹 샤르댕, <물잔과 커피포트>, 캔버스에 오일, 1760



정물화를 그릴 때 각각의 사물에는 바로 곁에 있는 다른 사물들의 빛깔을 조금씩 칠해야 한다고 배웠었다. 실제 그러하듯. 그리는 입장이 아니어도 정물화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거역할 수 없는 반영과 투영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한때는 무형으로 느껴졌던 사랑과 상실의 사건들이 단단하고 섬세한 색채의 몸을 가지고 마중 나오는 순간을. 정물을 통해 샤르댕은 보이지 않는 의식과 공기 속에만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사랑의 연대年代를 물질로 재현해낸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디로도 시간을 서둘러 건너지 않고 정물과 정물 사이, 정물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허물기를 반복하며 각자의 연대에 묻힌 죽음과 소외와 상실을 길어 올린다. 도피는 아니다. 소설 속 레오가 말한 것처럼, 샤르댕의 물잔은 아직 살아 있다는 자각 속으로 우리를 던져 버린다. 잔인한 파멸이나 연이은 상처에 대한 경고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근처, 우리의 바깥,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 위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색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기막힌 위로와 믿기 힘든 증거 앞에 내던져진다.


나는 샤르댕의 작품에서 사랑을 언급하는 것이 신비롭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터치 touch는 모든 인간의 삶의 중심에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첫 경험이다. 뇌졸중이라는 샤르댕의 육체성은 위로의 어루만짐과 손길을 모두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런 붓의 손길이, 샤르댕 작품에선 식탁보가 식탁에게 가지는 애정을 느낀다는 프루스트 말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 확신한다.

시리 허스트베트, <빨간색 크레용을 든 남자 The Man with the red crayon>



샤르댕, <물잔과 산딸기 바구니>, 캔버스에 오일, 1761



다시  샤르댕의 물잔 앞에서 나는 얼마  유명을 달리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이기도 했고 그녀이기도 했고 어쩌면  다였거나   아니었을 그이는 샤르댕의 물잔처럼 맑고 은은한 빛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가진  빛이 고귀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정을 지녔던 친구의 고통과 죽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며 당신만은  죽지 말고 살아내달라 얘기할 , 슬픔의 잿빛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너무나 투명해서 자기 안에  시시한 먼지들마저 감추지 못할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는 샤르댕의 물잔처럼 곁을 비추었다. 친분도 없는 죽은 이와 그림  정물이 되어 우정을 주고받는 상상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믿음에 가깝겠지만, 웬일인지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 이따금씩 그가 나를  물잔 앞으로 불러낼 거라는 확신이 든다. 돌이킬  없는 부재의 표식이자 애정 어린 반영과 감추지 말아야  포용의 앞으로.  



어느 날 한 아티스트가 색칠을 깨끗하고 완벽하게 하기 위해 한 모든 작업에 대해 길게 얘기하고 있었다. 샤르댕은 아는 거라곤 냉정하고 세심한 기술자가 되는 것 밖엔 없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데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누가 당신에게 페인팅이 색깔로 끝나는 거라고 합디까?" "그럼 뭘로 끝나는데요?"  또 다른 아티스트가 놀라 물었다. "색은 쓰이는 거지요. 그림은 감정으로 끝이 납니다."

프랑스 조각가 샤를 니콜라 코샹 Charles-Nicolai Cochin이 쓴 샤르댕의 삶에 관한 에세이에서



샤르댕, <배와 호두, 포도주 잔> 확대, 캔버스에 오일, 1768






*참고 서적


시리 허스트베트, 내가 사랑했던 것, 뮤진트리, 2013

시리 허스트베트, Mysteries of the rectangle, meditations on painting, Prinston architectural press, 2005



*참고 사이트


https://alchetron.com/Jean-Baptiste-Simeon-Chardin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art/great-works/chardin-jean-baptiste-simeon-glass-water-and-coffee-pot-1760-798010.html

https://books.google.de/books?id=o8O9DwAAQBAJ&pg=PA101&lpg=PA101&dq=Glass+of+Water+and+Coffee+Pot+(1760)&source=bl&ots=zP6QMEbg2R&sig=ACfU3U0ZBm1tABCfnY88-C9EgfKiBiWaiA&hl=ko&sa=X&ved=2ahUKEwiRsIv2jYrvAhWSO-wKHZi4Aco4FBDoATAEegQIBhAD#v=onepage&q=Glass%20of%20Water%20and%20Coffee%20Pot%20(1760)&f=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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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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