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로서의 자화상>
"이성이 상상을 단 한 번의 응시로 받아들일 경우 상상은 이성을 외부에서 감싸 안는 일종의 옷이 된다. 쉽게 벗을 수 있고 그것에 구속될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성이 상상을 쾌락으로 받아들일 때 상상은 일종의 살갗으로 변한다. 즉, 고통 없이는 쉽게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 『행간: 우리는 왜 비현실적인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 중
뭉뚝한 두 손과 굽은 관절을 가진 여성이 바다 동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다. 시간이라도 멈춘 듯 물결도 움직임도 없다. 그대로 있다간 가라앉고 마는 것 아닐까. 사회가 쉽사리 배제하고 무력화하는 두 육체를 통해 그려낸 수나우라 테일러의 자화상은, 그러나 어떤 종류의 영락零落도 자기 연민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그녀가 자신의 책 『짐을 끄는 짐승들 Beasts of burden』에서 자주 언급했던 '해방'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해우(海牛, 매너티*)로서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테일러는 관념을 기반으로 한 거리두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더 나아가 육체를 따라다니는 규범과 경계(인간과 비인간, 장애와 동물, 불구와 향유)들 사이를 횡보할 수 있는 상상의 사다리를 놓는다. 그녀가 이 상상의 사다리를 줄기차게 가로지르며 의심하는 차이의 규범들은, 흥미롭게도 두 육체의 구체적인 유사성(둥그렇게 말아 올려진 뭉뚝한 팔다리처럼)보다는 두 몸의 위치가 보여주는 동등한 부력, 보편적 존엄성에 의해 보다 더 강하게 철폐된다. 테일러의 자화상은 군상이 되었고 이제 하나의 장소가 된다. 다큐멘터리 [이그재민드 라이프]에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가 한 말을 빌려 비유하자면, 그녀의 자화상은 상호 의존하는 '장소'로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녀는 교차의 향유를 되찾고 서로를 종횡무진하며 서로를 돌본다.
*Manatee : 포유류 바다소목[海牛目] 매너티과의 총칭
수나우라 테일러 : 어릴 적 제가 걸으면 원숭이처럼 걷는다는 말을 들었던 게 기억이 나요. 장애인들을 향한 많은 폭력과 혐오는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이 늙고 죽을 거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그 원숭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음..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경계가 어디에 있나, 무엇이 비인간이 되는가가 궁금해져요.
주디스 버틀러 : 그 인간들(놀린 사람들)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군요.
테일러 : (웃으면서) 맞아요.
버틀러 : 아마 창조론자들이었을 거예요. “왜 우리가 원숭이랑 닮은 인간들이 있어야 해?”, 이러면서.
테일러 : 그렇지만 원숭이는 제 최애 동물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저는 칭찬을 받은 거죠.
버틀러 : 그러게 말이에요.
테일러 : 하지만 그 사이,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 혹은 죽음과 건강 사이 그 가운데 언제, 당신은 당신을 여전히 인간으로 생각하나요?
버틀러: 제 감각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을 상호의존의 장소로서 다시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략)
- 다큐멘터리 [이그재민드 라이프] 에서
질문이 남는다. 언제 어디쯤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당신은 언제나 인간으로만 식별되고 싶은가? 과연 우리의 인간성은 불구(不具)의 처소를 향유의 거처로 만들 수 있을까? 모두를 불구화하는 상상은 끔찍한 상상일까?
테일러의 자화상은 잊혔던 교차와 돌봄의 향유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이 향유는 다름 아닌 누구도 도태되지 않는 불구의 시간* 속에 있다. 불구의 시간과 불구의 상상이 단 한 번의 응시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살갗이 된다면, 우리에게는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불구의 상상이 우리의 쾌락이 된다면.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 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비유적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는 우리가 동물 같다거나 동물이라는 관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두 주장 모두 맞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루할 정도로 당연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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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연구자와 운동가들은 "불구의 시간 crip time"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이론화했다. 불구의 시간*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중
*불구(Crip): 수나우라 테일러에게 있어 "불구"라는 말은 결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고쳐야 할 상태도 아니다. 그녀는 '동물윤리의 불구화', '비거니즘의 불구화' 등의 표현을 자주 쓰는데, 테일러에게 불구화는 고정화된 틀 없이 서로 다른 능력들이 서로 다른 속도와 방법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화가, 작가, 장애운동가, 동물운동가이자 엄마. 선천성 관절 굽음증을 갖고 태어났고, 홈스쿨링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작품은 큐 아트 재단과 CUE Art Foundation 스미스소니언 Smithsonian Institute을 포함한 주요 갤러리에서 전시되었고 버클리 아트 뮤지엄 컬렉션 Berkeley Art Museum에 포함되어 있다. 2017년에 출판된 책 『짐을 끄는 짐승들 Beasts of burden』이 2018 미국 도서상을 받았다. 조안 미첼 그랜트 Joan Mitchell Foundation MFA Grant, 윈 뉴하우스 상 Wynn Newhouse Awards, 문화 동물 재단상 Animals and Culture Grant을 받은 바 있다. 2008년 자매이자 영화감독인 아스트라 테일러 Astra Taylor의 다큐멘터리 [이그재민드 라이프 Examined Life]에 출연해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대화를 나누었다.
장애학, 환경 인문학, 동물학, 환경 윤리 및 예술을 넘나들며 작업과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환경 과학 정책 경영학부의 조교수이다.
육체에 곧장 뒤이어 나타나는 무형의 영 속에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통한 상상적 교감이 이루어진다.
이 위에서,
상상을 토대로 움직이는 것이 이성이다.
조르조 아감벤
*배경 이미지
수나우라 테일러, <입맞춤 Kiss> , 2014, 야생 동물 사진 위에 유화로 작업, 12" x 12" x 2"
*참고 자료
조르조 아감벤 , 『행간: 우리는 왜 비현실적인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 윤병언 옮김, 자음과 모음, 2015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이마즈 유리 옮김, 오월의 봄, 2020
http://www.sunaurataylor.com/portfolio
https://en.wikipedia.org/wiki/Sunaura_Taylor
https://www.academia.edu/RegisterToDownload/BulkDownload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