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미술관, [Call me by my name]
베를린에 비가 잦아지며 유럽의 여름이 이렇게 또 가는구나 싶었던 8월 말, 오슬로에 갔다. 여름이 아직 거기 있었고 여기저기 언덕이 많은 오슬로의 지형이 기운을 북돋았다. 바깥 풍경에 내면의 굴곡이 동질감을 느꼈던 걸까. 사방이 평지인 베를린에 살다 보니 언덕의 효과를 다 배우는구나 싶었다. 아무튼. 오슬로의 쾌청하고 따사로운 날씨를 즐기며 도심 근처 야외에 설치된 그룹 전시를 둘러보고 일찌감치 뭉크 미술관으로 향했다. 거의 십 년만의 방문인데도 불구하고 첫 오슬로 여행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바뀐 게 없어서인지 미술관 주변 지리가 눈에 훤했다.
오슬로 비요르비카 Bjørvika에 세워진 새 뭉크 미술관의 개관(10월 22일)을 앞두고 기존의 뭉크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제목은 «콜 미 바이 마이 네임 - 예술과 역사, 정체성 정치의 대화 CALL ME BY MY NAME - CONVERSATION: ART, HISTORY AND IDENTITY POLITICS (큐레이터 모하메드 압디 Mohamed Abdi / 9월 30일 종료)»였다. 뭉크의 셀피를 주제로 한 사진전 «실험적 자아 에드바르 뭉크의 사진 THE EXPERIMENTAL SELF EDVARD MUNCH'S PHOTOGRAPHY»이 함께 열리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인상을 남긴 «콜 미 바이 마이 네임» 전시에 대해 기록해두려 한다.
전시는 이제껏 <초록 스카프를 한 검둥이 Negro* with Green Scarf>라고 알려져 온 뭉크의 그림 한 점으로 시작한다. 그림 속 모델의 이름은 술탄 압둘 카림 Sultan Abdul Karem. 이것이 진짜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1916년 가을, 뭉크는 친척이자 친구인 루드비그 라벤스베르그 Ludvig Ravensberg와 함께 오슬로를 투어 중이던 독일의 하겐벡 Hagenbeck 서커스를 보러 간다. 그곳에서 대담하고 매력적인 카림을 발견한 뭉크는 카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이후 뭉크는 정기적으로 서커스와 동물원을 찾아가 카림을 그린다. 이를 지켜본 라벤스베르그가 카림을 모델 겸 하인 겸 운전사로 고용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고, 카림은 바로 다음 날 뭉크의 스튜디오가 있는 오슬로 외곽의 에퀼리 Ekely를 방문한다.
카림과 뭉크가 얼마나 오래 함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뭉크는 술탄 압둘 카림을 모델로 일곱 점의 유화와 한 점의 석판화를 남겼다. 또한 뭉크의 그림 <클레오파트라와 노예>에서 볼 수 있듯이 카림은 다양한 역할의 모델로도 분했다.
카림에 관한 정보의 대부분은 라벤스베르그의 일기장에서 나왔다. 라벤스베르그는 1916년 11월 어느 일기에서 "니그로 술탄"을 뭉크의 세인트버나드 견 '밤세 Bamse'(테디베어를 뜻하는 노르웨이어)와 두 마리의 돼지 군나르 Gunnar, 시베르트 Sivert에 비교한다. 알다시피 사람을 짐승에 비교하는 숱한 말과 행동은 보통 양쪽 모두를 비하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한편, 뭉크는 1918년 오슬로 블롬크비스트 Blomqvist 갤러리에서 <녹색 스카프를 두른 아랍인 Araber grønt skjerf>이라는 제목을 붙여 카림의 초상화를 최초로 전시한다. 3년 후 이 그림의 제목은 <녹색 스카프를 두른 니그로 Neger med grønt skjerf>가 된다. 뭉크가 그린 인물들이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 마라 Marat, 잉거 Inger, 제이콥 토르 킬슨 Jacob Torkildsen 등과 같이 대개 이름과 함께 드러나는 것을 보면, 카림은 고유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흑인, 아랍인, 혹은 이국적인 비백인의 대표자로 뭉뚱그려져 인식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름이 없는 초상은 무엇이 다를까. 술탄 압둘 카림이 술탄 압둘 카림이 아니라, 니그로거나 아랍인이거나 개나 돼지에 가까운 무엇이었다면, 뭉크가 그린 것은 누구일까?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름을 짓고 이름으로 불리며 이름을 지우는가.
*알려두기
-위에 기록한 뭉크와 카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뭉크미술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내용을 번역하여 재구성했다.
-Negro* : 흑인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니그로는 비하의 의미가 강한 말이므로 검둥이라 표현했다.
*하겐벡 Hagenbeck 서커스단
카림이 일한 하겐벡 서커스단은 '흑인'과 '맘루크 아랍인 Mameluk Arabs(맘루크 : 중세 이집트를 다스리던 아랍인들이 외국인 노예를 사들여 만든 용병부대)'을 '오락 거리'로 무대에 세웠다. 서커스 감독인 칼 하겐벡 Carl Hagenbeck은 비백인 인종을 무대에 올리는 에스닉 쇼를 전문으로 했으며,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타문화에 대한 백인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이용했다. 물론 이런 인종 전시 이벤트는 하겐벡 서커스단에서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민주의 세력을 통해 이주당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판에 박힌 역할을 행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림의 새로운 제목을 검토 중인 미술관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는 뭉크 그림의 제목을 통해 드러나는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행위였다. 위대한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를 지키고 싶은 일부 애호가들에게는 실로 온당한 이 반인종주의적 실천이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미술관은 이 방법이 제국주의의 특권을 누린 한 명의 백인 남성 예술가를 미래로 이관하는 가장 명예로운 관문이라 생각한 듯하다.
에드바르 뭉크가 그린 술탄 압둘 카림이 우리 스스로의 편견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번 전시는 민족과 인종에 대한 역사적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인종차별, 정체성, 다양성에 대한 오늘날의 질문을 통해 미술관 본래의 역할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Can Edvard Munch’s pictures of Sultan Abdul Karem help us to understand our own prejudices? In this exhibition, we turn our focus towards historical ideas about ethnicity and race, and address the role of the museum itself in light of present-day questions about racism, identity and diversity.
뭉크 미술관 홈페이지
1918년 <초록 스카프를 걸친 아랍인>
1921년 <초록 스카프를 걸친 니그로>
1927년 <니그로>
1944년 <초록 숄을 두른 니그로>
2008년 <초록 스카프를 두른 아프리카인>
2021년 [제목 검토 중]
이름을 뜻하는 한자 명名은 어둔 저녁 멀리서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또는 자기 이름을 불러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름을 부른다는 뜻으로, 저녁 석夕과 입 구口 의 뜻을 합쳐 만든 글자라 한다. 무엇도 알아보기 힘든 깜깜한 밤, 누군지 알아보고 누군지 알려주기 위해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머릿속을 채운다. 이름을 부르는 시간은 존재를 기다리고 알리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카림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카림을 알아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카림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 아닐까.
[제목 검토 중 Title under consideration]이라는 말을 보고 처음 가졌던 질문은 '우리가 곧 카림의 이름을 부르게 될까?', '카림의 이름을 부르면 그림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일까?'였다. 이제 그보다 앞서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우리는 카림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기다리고 있다면, 설사 진짜 이름이 아니라 해도 기다리는 동안, 카림이 다가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그 이름을 먼저 부르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늘 그랬다. 어떤 존재, 어떤 미래를 기다리는 일은 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했다.
*...
하지만 솔직히, 제가 그리 관대하진 않습니다, 에드바르 씨.
소위 천재라 불리는 백인 남성을 그리 높게 쳐주지도 않고요.
당신을 숫총각으로 보는 게 더 수월하지요.
이 세상 여자들이 당신의 광팬이 되어주지 않는 것에 마음이 상해
황금 왕관, 빛나는 드레스, 피부의 윤기를 벗겨버린 왕비를 데려다
낡아빠진 침대 위에 폐위시킨 숫총각 말입니다.
당신의 열등감은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한
한 남성의 눈을 가렸습니다.
당신이 한 사람의 모든 존엄을 노예 삼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생각했을 거라는 추측은 무리가 아닙니다.
여성과 흑인 남성이 개犬인 것처럼
당신이 그저 개일뿐인 개를 그린 걸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우리에게 이렇다 할 단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들을 어떤 식으로 그렸는지와 관계없이
당신이 붙인 작품의 제목과 관계없이
미래를 위해, 당신은 다른 이들이 지우려 한 것을
저들이 저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옹호했고 보아야만 했죠.
여성과 멜라닌이 풍부한 사람들은 마치 뉴스처럼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인내심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걸 입증했지요.
소위 천재라 불리는 백인 남성은 우리는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이며, 우리는 평등하다는 사실을 배우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을 누려왔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무엇을 그리려 했든
당신은 똑똑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목소리 높여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남김없이 모조리.
- 구로 시베코 Guro Sibeko
구로 시베코 Guro Sibeko (1975.6.22~)
노르웨이의 소설가, 논픽션 저술가, 활동가.
노르웨이인 어머니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결별한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격리정책) 정권 시절의 난민이었다. 블리츠 Blitz 운동(1982년 오슬로에 설립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청소년 커뮤니티)에 합류하여 십 대에 불법 거주자가 될 때까지 라링엔 Rælingen에 살았다. 오슬로 대학에서 북유럽 언어와 문학을 공부했다.
레즈비언임을 공개한 시베코는 전국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및 트랜스젠더 협회의 부대표이기도 했다.
저서 - [Vingespenn (Gyldendal, 2009)], [Ctrl + Alt + Delete (Gyldendal, 2010)], [나는 어둠을 녹일 수 있다 Jeg kan oppløse mørket (Juritzen, 2013)], 아동도서 [블러드 문 나이트 Blodmånenatta (Cappelen Damm, 2011)], [Ildulven (Cappelen Damm, 2012)], 아버지의 전기 [투사의 심장 Krigerhjerte (2013)], 인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책 [인종주의의 시학 Rasismens poetikk (2019)]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영원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 <이름에게>, 작사 아이유/김이나
*빨간 색으로 번역한 글은 전시에 포함된 노르웨이의 소설가 구로 시베코 Guro Sibeko 낭독의 일부다. 구로 시베코는 뭉크의 <클레오파트라와 노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https://www.munchmuseet.no/en/exhibitions/call-me-by-my-name/guro-sibeko-tolker-kleopatra-og-slaven/에서 영상을 볼 수 있다. 노르웨이어 특유의 리듬이 매우 아름답다. 뜻을 이해하지 못해도 말속에 담긴 힘을 느끼기에 충분하니 들어보길 강력 추천한다.
*노르웨이 아티스트 친구의 말로는 이번 전시가 노르웨이 내에서 꽤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전시 규모가 작기도 했지만, 실제로 관객 수 또한 눈에 띄게 적었다. «콜 미 바이 마이 네임» 전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는 못했다. 찾으면 내용을 보충할 예정이다.
*이름 명名의 유래는 그림책 작가 휘리 님의 작업노트에서 맨처음 읽었다 .
*번역 오류나 사실 관계 오류에 대한 지적을 환영합니다.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
*참고 사이트
https://hanja.dict.naver.com/#/entry/ccko/d805c89be5374c4ab5a3ce3392e494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