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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May 30. 2019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함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역시 십 년 전과 닮은 모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인도가 아무리 다른 나라보다 변화 속도가 느리고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고 해도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느리게 흘러가는 인도의 시간이지만 멈춰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 갔던 곳들을 다시 찾아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볼 거라고 난 내심 기대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기대는 그만큼의 실망으로 돌아왔다. 십 년 만에 찾아온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유로운 영혼’들의 집결지였던 고아 안주나 해변은 다른 바닷가 관광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바다와 모래만 펼쳐져 있던 그 해변이 여기라는 거지? 타들어가듯 빨갛게 바다 속으로 지는 해를 바라봤던 모래사장은 어디였더라? 

다른 해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대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체인점 커피숍 ‘Cafe Coffee Day’는 물론,델리 여행자거리와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고만고만한 여행자용 식당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난 이곳뿐만 아니라 관광지들 대부분은 상업화되어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시켰다. 계획한 날보다 조금 짧아진 시간들을 뒤로 하고 나는 ‘함피’에 가는 일정을 조금 서둘렀다. 그곳은 고아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도시였음을 떠올리며.     

함피는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지가 있는, 우리나라의 ‘경주’ 같은 도시다. 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 남인도에서 번성한 힌두 왕조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수도였으며,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키슈킨다 왕국의 중심지였다. 후에 무슬림 연합국의 침략을 받아 왕조가 망해 폐허가 되었지만 함피는 그 폐허가 된 유적들이 옛 시간의 모습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폐허마저도 아름다워 보이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함피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나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반쯤 무너져버린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들은 아예 철거된 것도 있지만 반쯤 허물어진 채로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복층 건물의 아래층은 내부가 부서져 있고 위층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식이었다. 비루팍샤 사원을 중심으로 한 메인로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던 작은 상점들은 온데 간데 없었고 로컬 식당, 게스트하우스 같은 건물들도 형체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스런 얼굴로 건물들 사이에 멈춰 서 있을 때 유럽 사람으로 보이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동지의식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아니?” 

마침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그가 바로 답했다. 

“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 알고 있지? 그 후에 문제가 많이 생겼어.”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 개발로 인한 사회 문제를 연구, 조사 중인 국제 NGO의 연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근처 작은 식당에 함께 앉았고, 짜이를 주문했다. 짜이 한 모금을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으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발이 시작되면서 여기 있던 가게들하고 숙소, 집들이 철거됐어. 그 자리엔 큰 호텔이 들어온대.”

“그럼 거기 있던 사람들은 그냥 쫓겨난 거야?” 

“그런 셈이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정부에서 보상금은 줬어?

“집이 철거된 사람들은 지금 마을 밖에 있는 임시 주거지에서 살고 있고, 가게나 숙소들은 글쎄... 보상금으로는 다시 가게를 얻을 만한 정도가 안 되니까, 가게나 숙소를 운영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생업이 중단됐다고 봐야지. 최근 들어서는 가정 폭력도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임시 주거지로 쫓겨난 가장들이 술을 마시고 아내와 자식들을 폭행한다나 봐.” 

식당에서 일어나 다시 배낭을 메고 비루팍샤 사원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뜻밖에 골목 입구에서 낯익은 ‘키란 게스트하우스’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도 아직 이 게스트하우스는 남아 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는 부서진 건물들 사이에서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키란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키란 아저씨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Hello, welcome! come, come!"    

맙소사, 키란 아저씨 입에서 영어가! 그의 얼굴 주름살은 더 늘어났지만 십 년이란 시간은 위대한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미스터 키란은 이제 자연스러운 영어 인사말은 물론 손님을 환대하는 친절함까지, 그야말로 관광지 숙소 주인으로서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영어를 거의 못 해서 손님들과 대화할 때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하거나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그의 옛 모습이 주름진 입가의 미소 위로 살짝 스쳐 지나갔다.    

“벽에 그림이 있던 방 기억하세요? 파란색 벽 전체에다 함피 풍경을 그린 방인데, 마탕가 힐, 망고 트리, 원숭이 같은 그림이 있었어요. 그 방 아직 있어요?” 내가 묻는다.

“아, 파란 방 말이죠? 게스트하우스에 방들을 더 만들면서 벽에 페인트칠을 새로 다시 했어요.”

키란 아저씨는 눈으로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숙소 주인들이 숙소에 자리가 꽉 차서 찾아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야 할 때 아쉬움 반, 미안함 반으로 어색하게 짓는 표정 말이다. 십 년 전엔 본 적 없었던 종류의 얼굴 표정이었다.

“그때보다 지금 방이 더 좋아요. 더 깨끗하고, 편리해요.” 

실망한 듯한 내 얼굴을 보고 아저씨가 또박또박 덧붙였다. 잠시 마음속으로 갈등하다가 지금은 더 이상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다니며 숙소를 알아볼 기력이 없어서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방 열쇠를 받아 문을 열고 배낭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익숙하지만 아주 낯설어진 작은 방 안 침대 위에 털썩 지친 몸을 내려놓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글 : 엉덩이로 글쓰기 3기 이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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