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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r 17. 2024

<파묘>가 '쇠말뚝 음모론'을 소재로 쓴 지점이 아쉽다

<파묘>는 왜 '쇠말뚝'을 등장시켰나

뒤늦게 영화 <파묘>를 봤다.


<파묘>는 정말 솔직히 말해서,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중간부터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기 어려웠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보낸 시간만 해도 5분은 되는 것 같다. 영화 <곡성> 때에도 이랬는데 나는 아무래도 공포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인 거 같다. 이건 명백한 공포영화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춥고 힘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앞으로 한동안 시골이나 산골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특히, 어두운 시간에는 당분간 외출도 자제할 것 같다. 이렇게까지 공포영화를 못보는 사람이어도 괜찮은 걸까? 그렇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잘 만든 영화였다. 다시 볼 수 없겠지만 재밌었다.


얼마 영화 <건국전쟁> 감독이 <파묘>는 좌파영화라는 망언을 했는데, <파묘>를 보며 그가 주장한 것과 같은 코드를 느끼진 못했다. 민족주의는 대게 우파적인 사고방식에 해당하며, <파묘>는 민족신앙적 요소들을 소재로 한 단순한 오컬트 영화에 불과했다.


<파묘>는 영화로써 재밌는 영화였지만 '쇠말뚝'을 소재로 활용한 부분은 많이 아쉬웠다. '쇠말뚝론'은 명백한 정치적 음모론으로, 이 영화에 등장한 다른 민족신앙적 요소와 그 어떤 연결점도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옹호론을 만들어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인간에게는 반발심이란 게 있기에,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알게 된 인간은 아주 쉽게 돌아서곤 한다. 반일 '감정'을 당연한 것처럼 주입하는 사회 분위기가 되레 거대한 반대급부를 창출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정국이 이어지던 지난 2017년 당시 경기 오산의 안민석 의원이 "박정희가 빼돌린 국가 돈이 무려 8조 9000억 원이었고, 이는 현재 가치로 300조 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당시 한국정부의 전체 예산은 약 4조 원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었다.


만약 박정희가 8조 9000억 원을 빼돌렸다고 해도, 최순실 일당은 그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 가사 최씨에게 그와 같은 안목이 있다고 해도, 8조 9000억 원이라는 돈을 국제사회의 감시 없이 40년에 걸쳐 300조 원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2017년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빌 게이츠의 재산은 약 114조 원이었다. 안민석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 행성의 최고 부자는 현재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수준의 재산을 보유한 최순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은 그의 주장에 열광했고, 그는 독일까지 가서 거짓말에 살을 붙였다. 이에 독일 검찰은 안씨의 일방적 주장을 부인했으나 언론들 역시 이에 부화뇌동해 말이 안 되는 기사를 쏟아냈다. 안민석씨의 거짓말은 최순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희석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최씨를 향한 주장은 죄다 음모론이라는 식의 주장이 가능하게 했다. 안씨로 인해 소모된 사회적 에너지는 '한동안' 최씨 일당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싸우는 안민석이라는 네임밸류를 만들어주는 데 이용됐을 뿐 이 사회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지난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해방 50주년을 기념해 전국 산지에 박힌 쇠말뚝을 제거하겠다는 내용의 사업을 국정과제로 추진했다. 일제가 무려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산을 오가며 말뚝을 박고 다녔다는 주장에는 그 어떤 역사적 근거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미국에 맞서 전쟁까지 벌였던 제국이 미신에 빠져 산자락을 오가며 몰래 쇠말뚝이나 박고 다녔을 리가 없었다. 일본에게 한국은 '호랑이'가 아니라 식민지였다. 나는 영국의 역술인들이 인도를 오가며 저주 굿을 펼쳤다는 주장을 접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만약 일제가 실제로 쇠말뚝을 박고 다녔다면 이에 대한 기록이 없을 리 없기 때문에 '쇠말뚝론'은 정말 황당한 소리였다. 알고 보니 이는 어느 풍수가가 펼친 주장이었다. 그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했을 리가 없으니 거짓말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부는 쇠말뚝 제거를 예산까지 들여가며 국정과제로써 수행했다. 전국적으로 실태조사를 벌여 수백 개의 말뚝을 없앴는데 이것들이 일제에 의한 것이라는 근거는 없었으며 일부는 해당 지역 주민들이 구역 표시나 농사 등을 위해 박아둔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는 왜 역술인의 황당한 주장을 믿고 예산까지 들여 이처럼 황당한 일을 추진한 것일까? 나는 이것이 일종의 통치술이었다고 생각한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YS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해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를 얻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마치 안민석이 그랬던 것처럼 정권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 황당무계한 미신까지 동원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래야 '일제 잔재에 맞서는 멋진 정권'이라는 청사진이 완성되고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힐러리 지지연설을 했던 엘리자베스 워런 미 연방 상원의원 연설이 떠오른다. 그는 트럼프의 분열적인 통치술이 아주 오래된 스토리라고 했다.


"트럼프가 만들려는 건 공포와 증오의 미국이자 모두가 분열하는 미국입니다.


(그가 당선되면) 백인들은 흑인과 라티노에 맞서고,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유대교와 갈등합니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에 맞서 싸우고 모든 사람이 이민자에 맞서 싸웁니다. 인종, 종교, 전통, 성별, 파벌. 많을수록 좋습니다. 오하이오주의 백인 노동자들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흑인이나 플로리다주의 라티노 노동자들과 싸우면 누구에게 득이 될까요?


나누어 지배하라(divide and rule)은 미국의 오래된 통치술입니다. 마틴 루터킹은 알고 있었습니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이어진 행진 직후 그는 연설을 통해 인종차별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분열을 유지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미국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의 빈곤상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곤, 지금의 미국은 그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대신 '짐크로법'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당신이 백인인 한 흑인보다는 낫다.' 그렇습니다. 인종간 증오는 권력자들의 지위 유지 수단입니다."


나는 '쇠말뚝론'이 짐크로법과 같은 차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통치술은 일제가 이 땅을 떠난 1945년 8월 15일 이후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어 왔다. 일제의 만행 '쇠말뚝'이라는 주장은 일제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국인들을 겨냥한 주장이다. 이 음모론은 외부의 적을 상정해 놓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흔한 체제 수호 장치였다. 그래서 나는 소위 '쇠말뚝론'이 뻔뻔하고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가난했던 미국 남부의 백인들에게 "당신의 삶은 흑인들의 그것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영화 <파묘>가 '쇠말뚝 음모론'을 영화의 소재로 차용한 지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극중 유해진이 "(쇠말뚝의) 99%는 가짜"라고 하자 최민식은 "그럼 1%는?"이라는 이라는 대사를 무척이나 강조해서 말한다. 이는 해당 음모론에 힘을 실어준다. 이후 땅에서 쇠말뚝을 찾는 장면이 이어지고, 결국 찾지 못하지만 마치 쇠말뚝과 같이 서 있는 관과 키 큰 사람(?)이 등장해 마치 쇠말뚝이 있는 것과 같은 은유가 등장한다. 영화 <파묘>가 전통 민족신앙과 달리 단순한 정치적 음모론에 불과했던 쇠말뚝론을 소재로 삼은 지점이 참 아쉽다.


이 같은 영화의 소재 차용은 실제 현실에도 무척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6일,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을 썼다.


그는 "(영화 <파묘>가) 일제가 한반도의 기운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발을 위해 박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쇠말뚝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며 "예를 들어 북한산(삼각산)의 정상에는 26개나 쇠말뚝이 한곳에 박혀 있었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강북구의 전 공무원이 증언한다.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나 헝겊 등에 쇠말뚝을 박아 저주하는 방법은 일본에서 음양사들이 자주 사용한 저주 방법 중 하나였다"는 주장을 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주장에는 그 어떤 근거도 없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가 박았다는 단 하나의 쇠말뚝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사카 교수는 그 어떤 근거도 없음에도 공무원에게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유포했다.


대한민국에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 교수의 주장은 3200명의 공감을 받으며 급속히 확산됐다. 이 글을 본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일본 음양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일본계 한국인 교수의 말이니, 쇠말뚝은 정말 있었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이와 같은 '음모론'에 대한 반론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단 하나도 확인되지 않았고 그 어떤 기록도 없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우기니, 할 말이 없다.


영화 <파묘>가 900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10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사이 이 잘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주입했을지 생각해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신앙적 요소들만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와는 무관한 정치적 음모론을 소재로 활용하는 우를 범했다.


일본제국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고 단순히 악마화한 과거의 역사는 청산되어야 할 부끄러운 역사다. 영화의 재미와 별개로 이 부분이 참 안타깝다. 나는 영화 <동주>를 좋아한다. 거기 나오는 일본인 경찰의 "우리는 문명국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절차를 지킨다"는 대사야말로 일제의 야만적 실체를 가장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대사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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