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는 '정권심판론'을 핵심으로 양당을 중심으로 치러졌으며, 양당은 전체 의석수 300석 중 283석을 차지했다. 뒤이어 문재인 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법무부장관을 지냈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조국혁신당이 비례대표 의석 12석을 차지했으며, 나머지 의석은 개혁신당(3석), 새로운미래(1석), 진보당(1석)에게 돌아갔다.
이번 선거 지역구 당선자 중 제3정당 당선자는 새로운미래(1명), 진보당(1명), 개혁신당(1명)이 배출한 3명에 불과했다. 새로운미래 김종민 후보는 해당 지역구의 민주당 후보자가 당에 의해 공천 취소된 덕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경쟁 후보자의 공천 취소 이후부터 민주당 지지자들을 향해 연신 사과의 언사를 던졌으며, 애초부터 민주당적을 가지고 두 차례 당선된 양당 출신의 재선 국회의원이었다.
울산 북구에서 당선된 진보당 윤종오 후보는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통해 야권단일후보가 돼 당선됐다. 윤 후보는 단일화 없이 당선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해당 지역의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민주당 이상헌 의원과의 단일화를 통해 야권표가 그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국민의힘 후보와 1대1로 겨뤄 당선됐기 때문에 '온전히' 독자적 역량을 바탕으로 당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번 선거에서 양당 후보자가 모두 있는 지역에서 '독자적' 역량을 바탕으로 당선된 제3정당 후보는 경기 화성을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이준석 후보가 유일했다.
4년 전 오늘 치러진 21대 총선 당시에도, 양당 후보자가 모두 있는 지역에서 독자적 역량을 바탕으로 당선된 후보자가 있었다. 경기 고양갑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를 모두 제치고 당선된 정의당 심상정이었다. 당시 심은 지역구에서 당선된 유일한 제3정당 후보자였다. 불과 4년 만에, 심상정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이준석이 해냈고, 21대 국회에서 의석수 6석을 가진 원내 3당이었던 녹색정의당은 '원외정당'으로 밀려나게 됐다.
이번 총선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무척이나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이번 총선은 역대 총선 역사상 처음으로 무소속 당선자가 없는 선거가 됐다. 2016년에는 11명의 무소속 당선자가 있었고, 2020년에는 5명의 무소속 당선자가 있었다. 물론 2020년의 무소속 당선자 5명은 모두 양당 출신이었다. 홍준표, 김태호, 윤상현, 권성동, 이용호. 우리들 대부분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이들 다섯 사람은 현재 모두 국민의힘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한국 정치에서 양당(민주당, 국민의힘)이 행사하는 인력은 무척이나 강력하며 이번 선거를 통해 그 힘이 극단적으로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독자적' 역량을 지닌 제3정당을 사실상 소멸시켰다. 조국혁신당은 민주당 정부 법무부장관이 주도하고 있고, 이준석 개혁신당 지역구 당선자는 국민의힘 초대 당대표 출신이다. 윤종오 진보당 당선자는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통해 야권단일후보가 됐으며 진보당은 민주당이 주도한 더불어민주연합에 참여했다. 김종민 새로운미래 당선자는 민주당의 재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선거는 양당 출신이거나, 양당 소속이거나, 양당과 함께하지 않는 세력은 생존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이 같은 성격을 극명히 보여주듯, 지난 총선 당시 원내3당을 차지했던 녹색정의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 지난번과 같은 표를 얻지 못해 원외정당으로 밀려났다.
선거가 끝났으니 정말 솔직히 말해 보자면 녹색정의당은 불행했기는커녕,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에 비해 과분한 권한을 부여받았던 한국 정치사의 행운아에 가까웠다.
정의당은 양당의 인력이 강한 한국정치에서 위태로운 제3지대에 있었음에도 2012년 진보정의당 창당 이후 12년간 원내 정당의 지위를 지켰다. 정의당의 취약했던 정치적 기반에 비추어 볼 때, 이와 같은 장기간에 걸친 생존은 확실히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다른 제3지대 정당들은 양당의 인력에 끌려가 흡수됐거나 정의당보다 훨씬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도 원외정당으로 밀려났다. 21대 총선 당시 6선 의원이었던 천정배와 4선 의원이었던 박지원을 위시로 호남지역에서 상당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민생당마저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민주당으로 분위기가 모이자,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소멸됐다.
이번 선거 개표 방송을 통해 녹색정의당이 원외정당이 되었음을 확인한 후, 문득 10년 전(2014년) 일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 통합진보당의 청소년 당원이었다. 통합진보당은 그해 12월 19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됐다. 이 사건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진보정치 최대 세력이었던 이들을 '성공적으로' 원외로 밀어냈다. 국가권력의 각종 역량이 그들의 정치적 자산을 무너뜨리는 데 동원됐다.
물론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연합정당이었고, 진보정당의 설계자였던 노회찬이 판을 짜긴 했으나 노회찬은 그들(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참여 없이 진보정당은 성공할 수 없다고 봤다. 그만큼 그들은 확실한 주류였으며, 통합진보당을 나와 진보정의당을 만든 이들은 확실한 비주류였다.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당에는 5명의 국회의원과 3명의 광역의원, 34명의 기초의원이 있었다.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만 3만 명가량 됐다. 언론에 의해 국가의 적이 된 것과 별개로 그들은 지금의 녹색정의당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과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 등으로 당을 나와 진보정의당을 꾸린 이들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며 지역 기반도 전무했다. 그들이 보유했던 국회의원은 7명이었다. 이후 노회찬 의원이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강동원 의원이 탈당해 5명만 남았다.
당시 진보정의당의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과 심상정은 민주당과의 단일화를 통해 진보세가 강한 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와 1대1로 겨룬 덕에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노원병의 노회찬은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고, 고양갑의 심상정은 전국 최소 표차인 170표 차 신승을 거뒀다. 이 지역은 유시민이 재선 의원을 지내며 터를 닦아둔 곳이었다.
노회찬과 강동원이 의원직을 잃거나 당을 떠난 후 정의당에 남은 건 심상정 지역구 의원과 김제남, 정진후, 서기호, 박원석 비례대표 의원이었다. 이중 마지막까지 당을 지킨 건 심 의원 뿐이었으니 정의당의 정체성은 확실히 모호했다. 당명이 정의당이었던 것 역시 그 같은 모호성의 방증이었다. 김제남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 입성했고, 박원석 전 의원은 새로운미래에 합류했다. 다른 둘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국회 의석수를 6석으로 늘린다. 노회찬과 심상정이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비례대표 선거에서 171만 표를 받아 비례 의원이 4명 당선됐다. 지역 기반도 정치적 기반도 약했던 정의당이 의석을 늘릴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통합진보당 해산 후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온전히 재기하지 못해 정의당이 진보파의 정치적 공간을 독점할 수 있었음에 있었고, 둘째는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두 인물의 걸출함에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없었다면 정의당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올 수 있었다.
2020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269만 표를 받아 비례대표 의원 5명을 당선시킨다. 여기에 심을 더해 정의당의 마지막 의석 수는 6석이 됐다. 당시 선거에서 정의당은 제3당을 차지했고 국민의당도 제쳤다. 양당을 찍고 싶지 않았던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다수가 민주대연합론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표를 주었다고 해서 당에 확실히 묶여 있지도 않았다.
이때 정의당이 6석을 건진 건 박근혜 탄핵으로 인한 범야권의 대대적인 약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의당의 역대 비례대표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당의 정체성은 확실히 모호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재결집해 창당한 진보당은 역사적 경로를 통해 형성된 공통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의당은 합의된 이념도 없었고 소수 명망가 중심의 당이었다. 그동안 정의당이 여러 국면마다 심각하게 흔들렸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합의된 이념을 가지고 확실히 결집돼 있는 지지자들이 있었다면 당이 몇 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흔들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에,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모호하지만 민주당보다는 왼쪽에 있다는 포지션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류호정, 장혜영 의원을 지난 선거의 비례 의원으로 택한 건 심상정 이후에 노회찬, 심상정처럼 공중전에서 당을 대표할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 1번을 맡은 나순자 후보나 3번을 맡은 이보라미 후보는 노동 혹은 지역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보라미 후보가 지역에서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정의당이 왜 원내에 진출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돌쇠봉사단을 조직해 지역 노년층을 끊임없이 만나며 칼을 갈아주고 기계를 고쳐준 일, 이 일은 현재의 정의당을 형성하고 있는 주류적 인물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남 영암에 내려갈 일이 없다.
이건 체질의 문제다. 지금 당장 지역에 내려가서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정의당에 남아있지 않다. 진보당은 전남 나주에서도 칼갈이 봉사단을 만들어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애초부터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정의당 활동가들이 지역에 내려가 그런 일을 할 거라는 기대의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진보당과는 다른 체질을 가진 인물 중심의, 공중전 중심의 정당은 확실히 분위기와 바람의 방향이 변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진보당은 페미니즘 논란을 겪었다고 해도 살아 남았을 것 같다. 당이 정의당처럼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경로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으로 결집돼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몇몇 논란을 이유로 진성당원 수가 1.4만 명대까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당의 취약했던 정치적 기반과 지역 기반에 비추어 볼 때, 이 당이 2024년 5월 31일까지 국회 의석수 6석을 보유한 원내 정당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은 되레, 한국의 진보적 열망을 정의당이 독점한 결과로 생각된다.
선거가 끝난 후 많은 비평이 오간다. 최근 어떤 분이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정의당 당원들의 싸가지 없고 타인을 가르치려 한 태도가 당을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무너질 당이었다면 애초부터 보유하고 있던 기반을 돌아보는 게 맞다. 그분이 그와 같은 느낌을 받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게 핵심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정의당이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던 기반은 되레 걸출한 인물이었던 심상정과 정의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세상을 떠난 노회찬에게 있었다. 취약했던 정치적 기반과 지역 기반을 갖고 여기까지 온 게 오히려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의 체질을 생각할 때 녹색정의당의 부활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정의당은 이미 원내정당 체질에 갇혔으며 공중전을 중심으로, 걸출한 인물을 내세워 민주당 왼쪽 지지자들의 표를 받아 생존해 왔다. 이 당이 빠르게 새롭게 시작하려면 노회찬, 심상정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데 그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류호정, 장혜영을 비례대표 의원으로 내세운 건 이와 같은 당의 현실을 알고 있던 심의 마지막 단말마였다고 생각한다.
정의당은 '독자적' 진보정당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당을 뽑아준 시민들은 민주당의 왼쪽 블럭을 원했지 독자적 진보정당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총선 이후 한국 국회에는 단 한 명의 '독자적' 진보정당 의원도 남지 않았다. 민주당이 준연동형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한 비례 위성정당에 합류한 정당만이,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최근 '20년 만에 진보정당 의원이 0명이 됐다'는 기사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녹색정의당의 원내 진출 실패를 놓고 진보정당 의원이 없다고 하는 게 맞느냐는 반론과 이에 대한 재반론이 이어졌다. 중요한 건 타이틀이 아니라 실상이다. 22대 의회에 진보정당 의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자적' 진보정당 의원이 없음을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그동안 정의당은 행운에 안주했다. 진보정치 최대 세력이었던 통합진보당이 해산됐고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어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한 선거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 심상정 후보가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받은 201만 표는 민주당 후보가 사망한 상황에서 치러진 1956년 3대 대선에서 조봉암 후보가 받았던 216만 표 이래 한국 진보정당의 역대 최다 득표였다. 정의당은 이 마음을 바탕으로 2024년 5월 31일까지 국회의석수 6석을 유지했다.
심상정은 확실히 걸출한 인물이었다. 양당에 단 한 번도 소속돼 본 적 없는 제3정당 의원이 지역구에서 3번이나 당선돼 4선 의원까지 지냈다. 그러나 걸출한 인물 단 한 사람 가지고 제3정당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만큼 한국 정치는 만만하지 않다.
심상정 녹색정의당 경기 고양갑 후보는 22대 총선에서 18.41%를 득표해 3위로 낙선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온몸으로 진보 정치의 길을 감당해 온 것에 후회는 없지만 잠재력을 갖춘 훌륭한 후배 정치인들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도록 진보정당의 지속 가능한 전망을 끝내 열어내지 못한 것이 큰 회한으로 남는다"고 했다.
심상정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지금, 정의당의 체질에서 부활의 길을 찾기 어렵다. 특히 지역기반을 새롭게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렵다. 하방 가라는 말도 쉽게 오가곤 하지만, 전남 영암에 가서 돌쇠봉사단을 조직해 노년층을 만나 칼을 갈아주고 기계를 고쳐주며 활동할 생각이 없다면 쉽게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이건 '체질'의 문제다.
어제 새벽 늦은 시간에 친구와 함께 보리커피를 마시며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제작한 '한국의 진보' 3부작을 봤다. 꽤 오래된 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김문수, 원희룡, 김영환, 심상정, 노회찬, 황광우와 같은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민주노동당까지 다뤘다. 민주당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586세대에게 정서적인 공감의 마음을 보내는 시민들의 정당이라면, 진보정당은 전태일의 외침에 응답해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던 이들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시민들의 정당이었다.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 투쟁. 정말 대단한 투쟁들이었다. 그리고 2024년 5월 31일, 돌아보면 지난 '민주화 시대'의 역사적 파도 위에서 가장 왼쪽에 있었던 이들 중, 그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했던 마지막 상징 심상정이 국회를 떠난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중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동운동을 했던 원희룡은 국민의힘에 가서 어느새 중진이 됐다. 3선 국회의원과 재선 제주도지사, 국토부장관을 지냈다. 그 사이 역사의 파도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웠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다른 곳에서 빛나는 삶을 살게 됐다. 원래부터 그럴 뿌리를 갖춘 이들이었으니 놀랍진 않다.
아니, 놀라운 건 오히려 지난 시대다. 학력고사 전국 1등에 빛나는 원희룡이나 15등 김영환 같은 서울대 법대생들이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운동을 고민했던 일이 시대적 조류로써 한때나마 유지되었던 게 놀랍다.
원희룡과 김영환은 떠났지만 노회찬은 끝까지 진보정당을 지켰고 심상정은 그 연장선에서 양당도 아닌 진보정당 깃발을 들고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제3정당 지역구 3선'이라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어쩌면 선거에서 낙선한 지금이, 심상정이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시점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정치사에서 4선 의원은 늘 드물었고, 양당이나 양당 출신이 아닌 제3당 인물이 그 자리까지 간 건 전례가 없으니 심상정은 확실히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국의 진보'를 이끌었던 시대 조류가 역사의 파도 앞에서 잔잔한 물결이 되어 낮게 쓸려가고 있다. 문제는 늘 노회찬과 심상정이 아니라 그다음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녹색정의당에는 '다음'을 담보할 공통의 경험도 없고 걸출한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금방,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