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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Apr 18. 2024

5.18 성폭력 사건 16건이 '진상규명' 됐다

'5.18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조사 보고서'

광주MBC 뉴스데스크 갈무리


그래서, 내용을 살펴봤는데 진짜 가해자보다도 악독했던 가해자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들이 진상규명된 경위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공개한 '5.18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조사보고서'에 담겼다. 이 문서는 321페이지 분량으로,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상세히 담았다.


5.18진상조사위는 특별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위원회로, 장관급 위원장이 임명된다. 조사가 종료돼 사건의 진상이 규명된 경우 진상규명 조사 결과를 의결로써 결정한다. 아직 최종 보고서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위원회는 지난 2일 진상규명이 완료된 일부 사안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다. 그중 하나가 이 보고서이며, 5.18 당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중 16건이 '진상규명' 의결됐음이 공개됐다.


이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 공개를 앞두고 지역사회에서 여러 논란이 있지만, 위원회 위원들이 법률에 따라 의결을 마친 이 보고서는 이미 확정된 보고서에 해당한다.


위원회는 5.18 성폭력 피해 의혹 사건 52건 중 19건을 조사했고, 이중 16건이 조사 끝에 진상규명 되었다. 나머지 사건은 피해자의 조사 거부나 사망 등으로 인해 조사되지 못했다. 이 보고서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위원회 홈페이지에 그 전문이 공개돼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를 보면 된다.


이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은 후, 16명의 삶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끔찍했고, 고통스러웠고, 어떻게 하나 같이 틀에 박은 듯 이렇게들 사셨을까 싶었다. 1980년대 한국사회의 가부장제를 모르지 않았으나 막상 그 실상을 마주하고 나니 정말 분노스러웠다. 아래는 보고서 내용 중 피해자들의 삶을 간추린 글이다. 출처는 당연히 해당 보고서이고 이 글은 그 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에 불과하다. 5.18진상조사위가 만든 긴 보고서를 정독하는 시민이 많지 않을 것이나 나는 여러 방식으로 이 보고서의 내용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1. 광주에서 계엄군의 도심시위진압작전이 전개되던 1980년 5월 18일, A씨는 친구와 함께 쇼핑을 하러 시내에 나왔다. 그러나 당시 광주 도심에서는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고 A씨는 시위에 휘말리게 된다. A씨가 도망가려고 하자 군인 3명이 다가와 A씨의 어깨와 머리, 허리 등을 때렸고, 그중 한 명은 A씨의 가슴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살기 위해 죽은 듯 있자 다른 군인들이 달려와 군홧발로 머리를 밟는 등의 폭행을 했다. 그들은 A씨의 바지를 벗겼고, 상의를 벗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어 남방이 찢겨 나갔다. 이로써 A씨는 강제 탈의 피해를 입었다.


직후 5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쓰러져 있던 피해자를 부축해 정차돼 있던 버스로 데려갔고, 주변 사람들에게 옷을 벗어줄 것을 요청해 몸을 가려줬다. 이후 A씨는 친구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A씨는 결혼 이후에도 온몸이 쑤시고 두통과 허리통증이 지속되어 정기적으로 약을 먹었다. 임신 후에도 통증이 지속되었으나 약을 끊고 온몸의 통증을 견뎠다. 또다시 임신하게 될 걱정에 1990년에는 가족 몰래 난소낭종 절제술을 받았다.


A씨는 사건 전까지 굉장히 활달한 성격이었으나 사건 후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그런 일을 당한 여자를 데려갈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나는 결혼할 수 없다거나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후 엄마의 강권으로 결혼하게 되었고 남편은 A씨가 아들을 낳아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A씨는 '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사형과도 같이 느껴져 이혼까지 생각했다. 시부모가 손주를 낳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버리겠다는 말을 할 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과의 성관계는 결혼생활 내내 어려웠다.


A씨가 당한 성적 모욕 피해는 군 상급자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7공수여단 유모 하사관은 "당시 중대장과 지역대장이 붙잡은 시위대를 그냥 두면 시위대가 도망갈 수 있으니 도망가지 못하게 옷을 벗기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조모 하사관은 "인근 중대장이 남자는 진압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여자들은 웃통을 벗겨버리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A씨는 진상조사위에게 5.18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진상조사를 통해 피해 사실이 정확히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2. 광주에서 계엄군의 도심시위진압작전이 전개되던 1980년 5월 19일, B씨는 공용터미널에서 강제탈의 및 불법연행을 당했다. 군인 2명에게 붙잡힌 후 날카로운 대검이 등에 닿아 브래지어까지 찢겨져 나갔다. 신체 부위가 노출될까 걱정해 몸을 웅크렸고, 곧 군용트럭에 타게 됐다. 이후 풀려나 자취방에 오니 가슴 부위에 사선으로 10cm가량의 칼자국이 있었으나 깊은 상처는 아니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B씨는 자취방에서 광주 서부서 소속 형사 2명에게 연행됐다. 그런데 연행되던 길에 형사 1명이 B씨의 가슴 부위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후 유치장에 구금된 B씨는 위염, 대장염, 전신 근육통, 고관절 통증이 생겨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공용터미널에서 피해를 입었을 당시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떨치기 어려웠던 건 당시의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는 수치심이었다.


B씨는 형사의 추행은 단 몇 초간이었지만 인생의 심연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컸다고 했다. B씨는 1983년 대학 졸업 직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장애를 가진 남성과 결혼한 것도 5.18의 피해 경험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사건 이후 B씨는 일상에 오로지 몰두하며 그때의 기억을 잊고자 했고, 5.18이 화제가 되면 되도록 회피했다. 진상조사위는 피해자의 진술이 5.18 당시의 사회문화적 통념, 여성에게 결혼이 선택이 아니었던 시대적 상황과도 부합한다고 봤다.


3. 금남로4가에 있던 모 가게에서 일하던 C씨는 계엄군이 총에 칼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쫒아가는 모습을 가게 셔터와 안쪽 유리문 사이 틈새에서 목격했다. C씨는 직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퇴근했으나 한 군인이 C씨를 따라와 C씨의 상의와 브래지어를 들어 올리고 가슴 부위를 추행했다. C씨는 당시 가해 군인이 상당히 흥분해 있었음을 느꼈고 그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모습을 목격한 걸로 기억하고 있다. C씨는 가족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했고 사건 다음날부터 가게에 출근해지 않았다. 이후 성실한 편인데 결근했다는 생각에 두 번 다시 나가지 못했다.


이후 C씨는 극심한 자기혐오의 마음을 느끼며 살아왔다. 스무 살에 결혼을 한 후 출산을 했으나 더러운 젖을 아이에게 먹인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모유 수유 시마다 공포와 수치심, 죄책감이 들었다.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시부모에게 분유를 사달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C씨는 아이를 업고 시댁을 나와 가출했다. 어딘가에 집중할 곳이 필요했던 C씨는 이후 게임을 하면 일시적으로 후련한 기분이 들고,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현실의 도피처가 되어 줌을 느꼈다. 그는 20년 전부터 게임을 하다 지쳐 잠드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오랫동안 게임을 하고 나면 몸이 피곤해져 잠을 잘 수 있었다.


사건 직후 C씨 대인기피증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꺼렸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갖지 못해 남편과 한 이혼을 피해자 본인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혼 후에도 여러 남성들과의 만남이 진전되지 못했음은 성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며 현재까지 재혼하지 않고 딸 셋을 혼자 키워 왔다. C씨는 딸 아이 모유 수유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올라왔고 그로 인해 딸에게 정서적인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딸은 현재까지 은둔형 외톨이로 살고 있다. 자신이 딸과의 애착을 형성해야 하는 시기에 젖을 먹일 수 없어 밀어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하는 C씨는 딸을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4. 사건 당시 아이 엄마였던 D씨는 임신 3개월 차였다. 그는 본인의 승용차로 차량 운행 업무를 했다. D씨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8시~9시경 전남여고 후문 근처에서, 자신의 업무용 차량 안에서 강간을 당했다. 계엄군이 차량을 멈추게 한 후 차량 열쇠를 빼앗았고, 가해자는 2명이었다. 사건 직후 D씨는 낙태수술을 받았다.


D씨는 이후 예비군 옷만 보면 임신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택시운전사로 살면서도 군인과 함께 차에 있기 싫어서 터미널 같은 곳에는 가지 않았다. 머리가 자주 아파 정신과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했고 현재는 신경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 두 아들이 군복을 입는 것도 싫어 의무경찰로 보냈다.


사건 이후 D씨는 남편과의 성관계가 어려워 그와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 남편은 D씨를 일방적으로 무시했고, 딸이라도 있었으면 하소연이라도 했을텐데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D씨는 2018년에 사건 관련 조사를 받은 후 3주간 입원했다. 2018년에 피해를 신고하기 전까지 D씨는 남편과의 학력 차이 및 시댁 눈치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다. 그나마 운전으로 돈을 버는 것이 유일한 강점이었는데 사건 이후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D씨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고 검사도 저러고 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해 사건을 신고하게 됐다. 그러나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점이 신청 접수 과정의 애로사항이었다고 했다.


5. 시외버스 안내원으로 일하던 E씨는 역시 터미널에서 계엄군이 사람들을 마구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6시경, E씨가 타고 있던 버스에 공수부대원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승객들을 마구 때렸고, 버스를 이동시켰다. 어느 지점에서 계엄군 3명이 E씨를 데리고 나갔고, E씨는 거기서 그들 중 2명에게 강간을 당했다. 1명은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근처에 있던 돌 때문에 상처도 생겼고 많이 아팠다.


회사에 가니, 회사 언니가 "네가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내리게 한 것"이라며 아무에게도 (어제 버스에서 하차하게 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회사 측은 회사 이미지가 추락한다고 입단속을 시켰다. 사장은 시위대를 차에 태우지 말라고 했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기사가 다친 것을 포함해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처럼 티 내지 못하게 했다.


E씨는 두통 때문에 신경안정제 종류의 약을 많이 먹는다. 게보린을 1년에 360일, 많게는 5알까지 먹었다. 그에게 하혈은 삶의 일부분이 됐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전치태반으로 10개월을 거의 병원에서 생활했다. 이후 E씨는 자궁경부암에 걸렸다. 하필 그 암에 걸린 게 너무 억울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죽을 때까지 이 덫에서 못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1980년 11월, E씨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결혼을 전후로도 3차례 같은 시도를 했다. 그는 2014년 암 진단 전까지 술에 의존해 지냈다. 술만 마시면 동생에게 죽겠다고 했고 아이들 용돈을 뺏어 술을 사기도 했다. 사건 이후 인생 43년이 사라져 억울하고 우울하며, 잦은 짜증을 부리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폭력적 성격이 됐다. 사건 당시 피해를 당할 때 눈을 감아서 졌다는 생각을 해, 잠을 잘 못잔다. 둘째 아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E씨는 사정도 말하지 않고 통곡하며 말렸고 아들이 미워서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는 둘째 아들은 휴가를 나와도 집에 오지 않는다. E씨는 그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버스문을 열어 준 일이 후회된다고 했다.


E씨는 사건 전까지 회사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사건 후 얇은 옷과 치마를 입지 않고 성격이 불친절해졌다. 여성적인 복장과 말투를 사용하지 않고 살을 찌우는 등 외모와 성격 변화가 컸다. 이후 불친절 때문에 사회생활을 못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직장 자리를 알아봐주었으나 적응이 어려워 취업하지 못했고, 광주를 떠나 사는 결혼을 택했다.


잘난 남자를 만나면 과거를 눈치챌까 봐 일부러 배움이 짧은 남자와 34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결혼 후 남편과 정상적인 성관계를 갖지 못했다. E씨는 언제든 갈(자살) 사람이라 정을 주지 않으려 아들들을 보듬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다. 그러던 중, E씨는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조사단에 연락했다. 5.18 당시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선옥씨의 미투도 용기가 됐다.


6. 사진관을 운영했던 F씨는 5.18 당시 부상자를 치료하고 사진을 찍다가 동구청 지하보도에 갔다. 주변에 피가 흥건했다. 직후 계엄군이 옷을 찢고 목을 조르며 F씨를 눕혔다. 이에 강한 수치심을 느낀 F씨는 응급처치용 가위로 자해한 후 기절했다. F씨는 총알 파편이 박혀 수술을 받기도 했고, 그해 장 파열 수술을 받아 코마상태로 1년 8개월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계엄군에게 심각한 복부 구타를 당한 게 원인이 됐다.


사건 이후 F씨는 계엄군에게 성폭력을 당했음을 남편에게 말하며 이혼하자고 했고 여러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모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남편과 성관계는 전혀 할 수 없었고 트라우마로 인한 수면장애와 우울증을 심각하게 겪었다.


보고서에는 F씨는 성폭력을 수모라고 여겼고 피해 당시 차라리 죽자는 마음으로 자해했다며 피해 당시 30대 여성이던 피해자의 정조관념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수 있다고 쓰였다.


7. 사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G씨는 집에 가기 위해 남광주역 인근 큰 건물 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계엄군이 달려와 G씨를 강제추행했다. G씨는 여전히 장갑을 끼고 있던 군인이 자신의 가슴을 꽉 쥘 때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이후 G씨는 대검에 찔려 병원에 갔다.


G씨는 2018년부터 5.18 당시의 성폭력이 공론화되자 사건을 증언했으나 뉴스 밑에 달린 댓글을 보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상처를 많이 받았고, 딸도 더 이상 상처받지 말라는 취지로 인터뷰를 만류했다.


사건 후 G씨는 성격이 예민해지면서 피해의식이 커져 사람들 앞에 나서기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5.18 이후 쫓기듯 결혼하였고 남편과의 성관계가 무섭고 싫어 결국 이혼하게 됐다. G씨는 5.18 단체에서 활동하고 싶어 했으나 남편의 만류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피해까지 당한 걸 말할 수 없다고 느꼈으며 이혼 후에야 피해를 증언할 수 있었다.


조사위는 G씨에게는 법, 제도적 요인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가부장적인 통념이 피해 사실 발화를 억제한 주된 요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사건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통념이, 5.18이라는 사건에 대한 역사 왜곡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본 것이다.


8. 계엄군의 외곽봉쇄작전 당시 목포에 있던 H씨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부모와 시누이에게 안 맞은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이 맞았고 시댁에서 두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어쩔 수 없이 친정집을 향해 갔던 H씨는 무작정 걷던 중 군인 3명을 마주했다. 그중 한 명이 든 총이 탁 소리를 내는 걸 들었고, 그중 2명에게 강간 피해를 입었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건 31사단 93연대였다.


H씨는 이후 대인기피가 심해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1981년경부터 광주에 혼자 살면서 술에 의존해 살았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손가락이 마비되고 골반 뼈를 떼서 팔에 이식하는 등의 수술도 받았다. 7~8년 전 제초제를 컵에 따라 놓은 상태에서 여동생에게 전화해 5.18 때 강간을 당했다고 처음 말했고 아버지 무덤가에 화장해서 넣어달라는 유언을 했다. 음독 자살 시도 후, 당뇨 및 고혈압이 발생했다.


동생의 신고로 진상규명을 받게 된 H씨는 조사위 측에 괴로우니 조사가 중단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잘못이며 사건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 진상규명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결론이 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다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당한 사람은 평생이 아프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조사위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에 따라 피해 여성이 혼자서 참아내야 하는 경우 심한 정신적 장애나 결혼 후 적응 문제로 이어진다며 적절한 치료적 개입이 없을 경우 피해 여성들은 세상에 대한 불신, 부정적인 자아상 외에 우울증, 알코올이나 약물 남용, 성적인 문제 등과 같은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했다.


9. 광주 동구에 위치했던 회사 동료와 함께 귀가하는 길에 군복을 입은 남자 1명과 스포츠 머리에 사복을 입은 남자 2명에게 강간을 당한 I씨는 피해 당시 구타를 심하게 당해 이 3개가 부러졌다. 그날은 1980년 5월 22일~23일이었다. I씨는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을 여전히 자신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한다.


피해자는 결혼 후 잠결에 한 번만 봐달라는 이야기를 반복했고 남편의 추궁으로 피해 사실을 말하게 됐다. 그로 인해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백일도 안 된 아기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남편은 수시로 다른 남자하고 연애했다며 I씨를 구타했다.


아기는 아는 언니의 호적에 올렸고 현재도 공황장애 등으로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 조사위는 스포츠 머리에 사복을 입은 남성들이 5.18 당시 투입된 편의대 또는 낙오된 계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5월 22일 당시 작전 중 낙오돼 시민들에게 잡힌 계엄군 하사관의 더블백에는 온갖 장비가 있었으며 그는 붙잡힐 당시 사복차림이었다.


10. 계엄군의 외곽봉쇄작전이 진행되고 있던 1980년 5월 24일, 시위대 차량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J씨는 군복을 입은 군인 2명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했다. 피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숨겨 왔고, 1985년경 결혼하였으나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어려웠고, 어머니가 10여년 전 돌아가신 것에 대해 현재도 자책하고 있다.


피해자는 사건 당시 안내양으로 일했다. 1980년 당시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나 사건 이후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현재 J씨는 목욕탕 세신사다. 그는 진술조사 당시 자신이 문자를 능숙하게 쓰고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남이 알게 되는 게 부끄럽다며 신뢰관계인의 동석을 거부했다.


11. 광주항쟁 당시 YWCA에 있었던 K씨는 5월 27일 새벽, 그곳 1층에서 체포됐다. 건물에서 나올 때부터 구타를 당했고, 지프차에 올라 타려는 순간 대검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성기 부위를 찔렸다. 이후 통증과 하혈이 계속 되었고 풀려 난 후에도 한 달에 3주간 생리를 하고 통증이 계속 됐다.


이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여자로 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산부인과에 가서 난소 하나는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상처 부위가 딱딱하게 굳어져 결국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 그날 이후 K씨는 여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상무대에서 시신을 닦는 꿈을 반복해서 꾸며 불면에 시달렸고 오랫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자신이 '자궁 없는 병신'으로 느껴진다며 생리대를 반복 구입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K씨를 임종 순간까지 투명인간 취급했다. 가족들은 돈을 주며 그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했다. 남동생이 농촌지도자상을 받게 됐을 땐 신원조회에서 구금 사실이 알려져 동네 이장이 고향에 오지 말라고 했다. 5.18 당시 K씨에게는 약혼자가 있었으나 연행 사실을 안 약혼자는 연락을 끊었다.


12. 광주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L씨는 5월 27일 새벽 모든 시민은 나와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방송을 들었다. 직후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체포돼 연행됐다. 서석병원 옥상으로 끌려 갔을 때 계엄군 1명이 옷 속에 손을 넣어 L씨를 추행했다. 이어 시청 당직실에서 간첩들은 암수표나 마이크로필름 같은 걸 숨긴다며 상의와 하의 옷 솔기를 샅샅이 만져가는 방식의 수색을 당해 수치심을 느꼈다. 유치장에서는 보안과 형사 다수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성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그날 이후 L씨는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43살까지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 부분이 아예 없는 것처럼 여성 목회자의 길을 걸었고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탈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쉼터장으로 일했다.


피해자에 대한 상담을 진행한 전문위원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기습적으로 당한 추행과 구타는 강간에 준하는 공포로 기억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13. 광주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도청에 있었던 M씨는 사귀던 사람이었던 손모씨의 죽음을 알게 돼 도청에 합류했다. 손씨는 5.18 당시 31사단 방위였기 때문에 5.18묘역에 있지는 않다. 이후 M씨는 도청 1층 상황실에서 연행됐다. M씨는 상무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로 자신을 인솔했던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후 석방돼 집으로 돌아온 M씨는 수면제를 모아 자살 시도를 했고, 며칠 사이에 인간의 밑바닥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고 책 읽는 걸 좋아했던 M씨는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성격이 됐다. 가족들은 M씨가 애인의 죽음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해 결혼을 주선했다. 신혼 초 M씨는 지속적으로 악몽을 꿨고, 자신이 겪은 피해를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처음에는 M씨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 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술을 마시고 M씨를 괴롭혔고 과거의 아픈 상처는 약점이 됐다. M씨는 남편의 부당한 언행에 맞서지 못했다.


M씨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을 따로 만나고 싶다고 했다. 20대 초반 여성으로서 성폭력을 당한 후 사회적으로 고립돼 일하지 못하고 자신이 약점 있는 여성이라는 생각에 묶인다면 성장의 동력을 얻기 어렵다며,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을 만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5.18민주묘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14. 김선옥씨는 지난 2018년 당시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고 5.18 당시의 성폭력 피해를 고발했다. 그는 상무대에서 조사를 받은 후 담당 수사관에게 강간을 당했고, 석방된 후 자살 시도를 했다.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렸다. 5.18 당시 희생된 분들이 벌떡 일어나는 꿈을 꿨다. 가해자의 알 수 없는 눈빛이 꿈 속에서 반복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몸져누웠다.


그의 직업을 교사였다. 그러나 5.18 때문에 교사발령이 나지 않았고, 전남교육위원회 보안회의를 걸쳐 어렵게 임용됐다. 교직생활 중 학교장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분기별로 그의 동태를 교육위원회에 보고 했다. 5.18 당시 전남대 명노근 교수의 연설을 듣고 학생수습위에 참여했음을 두고 그를 운동권이라 본 것이다.


아버지는 술에 의존하다가 명예퇴직했고, 어머니는 51세의 나이로 간경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피해자는 사건 후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엄마로서의 삶만 살았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그가 아빠 역할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담겼으나 자세한 내막은 기록되지 않았다. 나는 이게 김선옥씨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가해자는 경찰이었다. 그는 조사위의 추궁을 받자 자신은 모범경찰로서 16년간 근무했으며 여자관계도 깨끗하며 표창장도 23장이나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입수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뇌물수수 혐의와 직장 무단이탈로 파면됐다. 그는 질병을 이유로 조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진단서는 정형외과 원장이 된 그의 의사 아들이 발급해 준 것이었다. 그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피해자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고 용기를 얻었으나 증언 후 지나친 주목에 시달려 광주를 떠나 살게 되었다. 현재는 유방암이 난소로 전이돼 난소암 2기 말 판정을 받고 서울삼성병원에 입원 중이다.


15. 계엄군의 광주항쟁 진압 당시 빨갱이를 잡으러 왔다는 군인 한 명이 피해자 N씨의 자택에 침입했다. N씨는 강간미수 피해를 입었고, 가해 군인은 출동한 경찰과 군인에게 체포됐다. 피해자는 대검에 찔려 부상을 입었는데 등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보다 상의가 벗겨져 젊은 남성들이 그것을 본 일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고 했다.


사건은 은폐됐다. 출동한 군인들이 가해 군인을 체포해 골목에 끌고가 구타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나 사건 처리는 하지 않고 무마했다.


어머니는 사건 후 피해자를 서둘러 혼인시켰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냥 혼자 살지 왜 시집 왔느냐며 그를 수시로 구타했다. 그는 성장한 자식들의 권유로 52세가 된 후에야 남편과 이혼했다.

16번째 사건은 이 글에 넣지 않았다. 내용이 방대하고 쟁점이 있어, 따로 글을 쓰든지 할 것 같다. 혹여나 이 사건까지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앞서 언급한 홈페이지에서 보고서를 다운로드 받으셔서 읽어보시면 된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발생할 당시 일부 계엄군은 중대장 등의 지시를 어기면서 민간인 여성을 숨겨주거나 학생증을 확인하고도 풀어주었다. 옷이 벗겨진 여성을 위해 간호사 가운을 받아 덮어 주기도 하였다. 골목에서 넝마주이 여성을 강간하고 나온 상사가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며 비열한 행동을 한 상급자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조사위는 이와 같은 피해가 5.18 피해보다 뒤늦게 공론화된 점에 착안하여, 5.18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사실 발화 요인에는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 그 이상이 필요했다고 봤다. 나는 그것을 한국 가부장제가 형성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으로 읽었다. 그날이 국가기념일이 되고 명예회복이 본격화된 후에도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있기까지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조사위는 사건 후 사망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피해자,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광주가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서를 끊임없이 읽고 있는 나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가 그저 어느 국가기관의 홈페이지에 업로드돼 있을 뿐인 아무도 읽지 않는 문서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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