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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Aug 20. 2022

싸람.. 우리는 크게 될 사람

싸람연대- 소성리편

싸람: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ssaram.co.kr)


‘싸람’이 되기 전에 우리는 작은사업장의 투쟁을 기록해보자고 모였다. 정말 작은 사업장이 있기도 했지만, 원래는 작은 사업장이 아니었다가 투쟁을 하면서 소수가 되거나, 남은 사람은 적지만 사안의 크기가 결코 작지않은, 자신을 위한 싸움이 전체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큰 요구를 걸고 싸우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이들을 우리는 작은 사업장이라고 불렀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을 뿐 결코 작지 않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재조명하고 싶었다. 싸우는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록하기로 했다. 우리의 작업은 ‘싸우는노동자기록팀’이 되었고, 싸우는 노동자,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을 ‘싸람’ 이라고 부른다.      

싸람은 취재를 하기 위해서 싸움의 현장을 찾아가고, 우리가 취재하는 사업장이 잘 싸울 수 있게 지지하고 연대하러 한 달에 한번씩 취재사업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노동자를 편드는 글을 쓰는 기록노동자이고, 사드를 반대하는 성주주민이다. 미국의 전략무기 사드는 내 인생에 불청객이 되어 찾아와서 나를 반전평화운동가로 변신시켜주었다. 한국정부는 코로나19 감염병이 유행하는 2021년 5월 14일부터 사드-미군기지로 가는 소성리마을길을 미군과 군수물자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열어주겠다면서 군경합동작전전을 펼쳤다. 소성리 주민들은 사드-미군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소성리마을길로 미군과 미군이 운행하는 군대차량 그리고 군사기지를 운영하는 유류차가 함부러 다니지 못하게 수 년 동안 마을길을 지켰다. 수백, 수천의 경찰병력은 일주일에 두 번씩 소성리로 들어오다가 2022년 3월부터 일주일에 세 번으로 횟수를 늘렸고, 6월이 되어서는 주5일 작전을 시작했다.      

소성리는 싸람의 취재사업장은 아니지만, 동료들은 내가 싸우는 현장 소성리로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동료들이 오는 날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동료들이 MT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소성리의 하얀 옥탑방을 숙소로 빌렸다. 옥탑방 쥔장은 소성리의 젊은 주민이고 사드반대하는 연대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숙소로 잘 빌려주었지만, 2층 옥탑방만큼은 애정하는 자신의 공간이라 남에게 쉽게 빌려주지 않았다. 예전에 나는 그에게 객실이용권을 쓸 수 있게 약속을 받아 놓았고, 이번에 동료들이 내려온다길래 이용권을 쓰겠다고 일찍 말해두었다. 쥔장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내가 옥탑방을 쓰는 것을 허락했지만, 연대하러 오는 사람들은 기다려졌나보다. 날짜가 한참 남았는데도 언제 오냐면서 오기로 한 날도 아닌 날에 방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성리는 6월 7일부터 경찰이 주5일 들어오겠다고 한 상태였다. 미국정부는 사드-미군기지 앞을 미군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게 무슨 동맹이냐고 질타를 했고, 한국정부는 자국민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마을길을 완전히 개방할 때까지 경찰병력을 투입해서 주민들의 저항을 꺾겠다고 했다. 나의 동료들은 6월 6일 현충일 공휴일 저녁에 내려와서 다음날인 7일, 주5일 경찰작전을 시작하는 날에 소성리 연대를 하게 되었다.     


나의 동료들은 새벽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닭이 목청껏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쳐야 했고, 닭은 시간을 알 수 없는 신새벽 어둠 속에서 옆집 닭과 주거니 받거니 울어대어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했다. 덕분에 동료들은 늦잠을 자지 않았다. 시간 보다 일찍 소성리마을회관으로 나왔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새벽 6시면 우리는 마을길로 나와서 아침기도회를 준비했다. 경찰들은 초록색 질서유지선을 치러 내려왔다. 처음엔 사람들이 도로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싸웠지만, 이젠 우리가 일찍 도로로 나오면 경찰들은 뒤에 질서유지선을 치고 도로로 나온 사람은 질서유지선을 넘지 못하게 통제한다. 마을안에 있는 사람은 질서유지선을 넘지 못하게 감시한다.      

원불교 기도회를 마치고 개신교 기도회가 시작되자 6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 경찰병력이 우리를 둘러쌌다. 기도회 중간에도 수시로 ‘불법집회 하지 말고 자진해산’ 하라고 경고방송을 하지만, 직접 해산을 하기 직전에 기동대장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중언부언 경고방송을 한다. 그러고 나면 경찰들이 삼삼오오 기도회 하는 사람들 안으로 불쑥 들어와서 ‘일어나서 나가라’고 권하다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해서 양팔과 양다리를 잡아서 끌어낸다. 


경찰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목욕의자에 앉은 우리는 바닥에 깔판을 깔고 앉았다. 나는 하은의 팔을 꼭 껴안았고, 하은은 태은과 팔짱을 끼면서 몸을 바짝 붙였다. 내 뒤에 희정과 윤영이 팔짱을 꼭 끼고 있었는데, 여자경찰들이 둘 사이를 억지로 잡아 떼고 윤영을 번쩍 들고 나갔고, 윤영이 고함치는 소리에 우리도 몸을 뒤로 돌려서 윤영의 다리를 잡기도 했지만, 경찰들은 안전하게 모시겠다면서 우리를 떼어내고 안 나가겠다는 윤영을 억지로 끌고 나갔다. 다음에 희정이 끌려나갔다. 둘이 나갈 때만 해도 꽤나 길게 실랑이를 하면서 발버둥을 쳤다. 우리 차례가 되자 대화경찰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일어나서 나가라고 경고할 때, 우리는 내 발로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라 하은, 태은 그리고 서울에서 온 젊은 여성활동가까지 넷이서 팔짱을 끼고 자리를 지켰다. 여자경찰이 서울에서 온 여성활동가와 태은이 낀 팔 위로 무릎을 굽혀서 힘을 주어 끊었다. 위험하게 네 번째 여성을 끌고 나갔다. 경찰은 일어나서 걸어나가라고 다급하게 협박해댔지만, 나와 하은과 태은은 호락호락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뒤에서 다른 경찰이 다가와서는 여자경찰들을 다 빼라고 지시했다. 우리를 놔두라고 했고, 일어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내 앞에 선 대화경찰은 격앙된 어조로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면서 소리를 지르고 옆으로 나가버렸고, 경찰들이 모여서 뭔가를 의논하더니 다시 다가와서 일어나라고 다금질 했다. 나는 우리 셋을 한꺼번에 다 들고 나가라고 했지만 경찰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우리를 겁박했다. 우리 바로 뒤에 호송차가 내려왔고, 검은 저승사자 같은 체포조 형사가 서 있었다.       


원불교 강현욱 교무는 나와 동료들이 체포당할까봐 걱정해서 일어나라고 권했지만, 그 날은 경찰이 주5일 작전을 시작하겠다고 한 만큼 체포되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우리는 한국정부가 미군의 편의를 위해서 무작정 경찰을 앞세워서 소성리마을 주민들을 핍박하고 자국민에게 무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 항의하고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멀리서 온 하은과 태은이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미안해 하지 않고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소성리마을의 임순분 부녀회장님이 내게 다가와서 일어나라고 강권했다. 연대자들이 연행되면 할머니들이 걱정하고 위축된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긴긴 싸움을 해나갈 수 있겠냐고 나를 달래고 채근했다. 나를 일으켜세우려고 했다. 나는 부녀회장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소성리에서 몸도 마음도 성한 곳이 없을 부녀회장님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걱정했다. 할머니들이 걱정하면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짓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백광순할머니가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겠다고 강교무님께 말씀을 드렸고, 하은과 태은에게도 일어서자고 전했다. 백광순할머니는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가 앉은 곳 바로 앞에 사드-미군기지로 들어가겠다고 공사인부를 태운 트럭이 서있는 모습을 보면 그 자리를 쉽게 일어날 수가 없다. 저 차가 사드-미군기지로 들어가는 것을 눈감아주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수 십 번을 망설이게 된다. 차라리 안 보면 이렇게 자존심이 무너지지는 않을텐데 싶지만, 마음이 무너지고 자존심이 문드러져도 우리는 마을길로 나와서 지키고 지켰다. 나와 내 동료들이 체포될 지도 모를 위기에 몰리자 백광순할머니도 더 고집을 피우지 않고 못 이긴 척 하면서 일어났다. 나도 백광순할머니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내 동료들도 함께 일어나서 마을회관 쪽으로 들어왔다. 하은이 분노를 토하는 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6월에도 소성리의 새벽은 난로굴뚝에 연기가 피워올랐고, 마을회관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난로가에 모여들어 불을 쬐고 있었다. 부엌에는 부녀회원들이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경찰병력이 주5일 들어오면 밥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성리할머니들은 연대자들만 보면 ‘밥은 먹고 다니냐’ 고 입버릇처럼 묻는다. 멀리서 새벽이슬 맞으면서 달려온 연대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 해주지 못하는 걸 마음 아파 하셨고,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 부녀회장님과 규란 어머니, 태환언니 같은 부엌일을 할만한 주민들은 매번 밥을 준비하는 게 버겁기만 하다. 다행히 성주의 평화여성모임이나 희년공동체 같은 곳에서 한번씩 밥연대를 하러 오셨고, 십시일반밥묵차, 우리밥연대, 다른세상을꿈꾸는밥차밥통 같은 밥연대하는 단체들이 철철이 소성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주셨다. 멀리 떨어진 교당에서 원불교 교무님들이 찾아오지 못하면 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시기도 해서 일손을 덜어주었다. 


소성리부녀회는 우리밥연대에서 보내준 반찬으로 밥상을 차렸고, 숭늉을 끓여서 연대자들을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건 설거지라서 밥을 먹고 부엌을 향했더니 나의 동료들이 따라 들어와서 뒷정리를 도왔고, 희정과 태은이 밥상을 치우는 동안 하은과 윤영이 설거지를 말끔히 해주었다.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싸움도 잘해, 설거지도 잘해, 세상에 이런 기록팀은 없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다. 할머니들과 마루에 앉아서 설거지 하는 내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녀회장님과 마을주민들 앞에서 괜히 내 어깨가 으쓱했다.     


작년 연말에 내 앞날이 어떻게 될까 궁금한 마음과 뭔가 빛이 될 만한 조각 하나 줍고 싶은 마음에 점성술을 질 본다는‘마녀타로’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상담을 하던 중에 마녀가 내게 내년(올해) 6월 쯤에 아주 좋은 기회가 올거라고 말해주었다. 아주 큰 행운이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더라도 꼭 붙잡아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그동안 노력했던 것의 결실을 맺을 기회라서 놓치면 또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내 동료들에게 내가 크게 될 운이 있음을 알리고 그게 뭘지 상상하면서 ‘모두 내 뒤로 줄을 서시오’ 하며 농담을 하고, 즐거운 궁리를 했었다. 

6월이 다 되어가도록 어디서 나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고, 내가 딱히 잘 될 만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마녀의 예언은 입에서 살살 녹는 사탕이고 딱 6개월짜리 달콤한 유효기간이었나보다 하던 찰나에 나의 동료들이 소성리로 찾아왔다. 

마녀의 타로로 상담을 하고 난 얼마 후에 우리는 작은 사업장, 규모의 의미보다 길고 빡세게 투쟁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싸우는 노동자들을 기록하고 남겨보자고 모였다.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 / 싸람’ 이란 작명은 입에 착착 감긴다. 경상도 버전인가 싶지만 분명한 표준어다. 신중하게 접근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취재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글이 더딘 게 함정이지만 우리는 세상의 모든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싸우고 글을 쓸 계획이다. 동료들이 내 곁에 있을 때 나는 빛난다. 내가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이들과 함게 찍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게 가장 큰 행운이 바로 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들이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애쓰지 않고 지켜지는 것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내가 큰 복을 받았으니 마녀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동료들은 앞으로 크게 될 사람들이다. 그들 곁에 있는 나도 크게 될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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