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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Sep 28. 2016

부산, 파리, 바르셀로나

연애 - 배꼽1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또, 또, 모든 것을 공유하려 든다. 하나가 되려 하고, 같지 않을 때 쌍심지를 켜거나, 소유하려 들고, 내 모자란 마음과 불완전하고 못난 모습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다른 누구에게 어떻게 이해시키고 심지어 애정까지 바랄 수 있겠나. 어려움에 직면하면 숨어버릴 누구부터 찾는 이 습성, 마음 안의 모든 말을 다 뱉어버리고 상대에게 불편함과 짐을 지우는 이 습성. 마음을 편안하게 먹자. 가장 중요한 건 여유, 그리고 또 여유. 여유니까! 내 삶에 만족하고 내가 여유를 가질 때 남 역시 품어줄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애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두 개인의 합이 되는 거시다!! 여유, 낙관, 긍정, 내 삶에서 평화, 나의 주변과 내 삶에 집중하기. 타인의 시선 초월하기. "


교제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었을까, 싸X월드 미니홈피에 이런 걸 써놨었다. 이 즈음에는 가능했던 자기 제어도 시간이 갈수록 방향을 잃었고, 나는 상대를 그리고 우리를 나의 불완전함과 집착이 만들어낸 구덩이로 끝없이 밀어놓고 우리는 쉼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나의 자아를 ‘우리’와 구분하지 못하고 사경을 한참 헤매던 때, 연인이라는 이름만으로 나의 불안으로 그를 상처 내고 헤집어 놓았을 때, 다행히도 그는 멀고도 가까운 곳으로 떠났고, 나는 그렇게 차였다. 


그렇게 서로의 부모님까지 뵈었던 나름의 진지한 첫 이성교제가 끝이 나고, 나는 대학 4년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인생에서 가장 날씬한 상태를 유지했으며, 두 개의 외국어 자격증을 땄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내일이 없을 것처럼 대학 마지막 학기를 독하게 보내고선 도망치듯 부산으로 떠나 여름과 가을을 영화제로 (술로 야근으로) 바쁘게 지냈고, 많은 어른들을 만나고 마감에 쫓기는 매일을 살면서 그를 떠올리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가 새로운 그녀를 만났을 즈음이었을까. 회식이 끝나고 밤의 취한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졌던 9월의 어느 순간에, 이제야 떠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게 된 그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고객의 요청으로 착신이 불가하다는 목소리로 통화는 끝나버렸다. 


밤을 지새우며 전쟁처럼 매일을 후회 없이 달렸던 영화제 근무가 끝나고, 나는 매일 같이 없는 약속을 만들었다. 새벽까지 내 존재를 잊을 만큼 거나하게 취해서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 정오 즈음에야 눈을 떴다. 소셜 미디어, 메신저를 옮겨 다니며 남의 이야기를 생각 없이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다시 억지로 만든 약속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 이 불덩이 같은 삶을, 직면하면 눈이 멀어버릴 줄 알았고 손에 쥐면 타버리고 남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취기가 아니고선 웃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자리가 필요했던 사람들과의 모임이, 나의 삶이자 나라고 생각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이면 빛이 잘 닿지 않던 망원동의 원룸에까지 빛이 찾아들어 나를 들춰내고 오늘도 해가 떴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로 무겁게 나를 짓이기는 것 같았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아무 의무도 지워지지 않은 때에 나는 내 존재를 가지고도 갈 길을 잃었다.


메신저로 매 순간에 살아있음을 서로 증명하는 생활과는 동떨어진 '솔로'의 삶에 익숙해졌을 즈음, 나는 프랑스로 떠났다. 영화제를 끝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해외 취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나의 패기는 어른들의 현실적인 조언으로 - 특히나 ‘동양인’ ‘여자’라는 마이너리티의 조건을 많이도 갖춘 내가 일을 쉽게 찾을 수 있겠냐는 걱정은 참으로 영향이 컸다 - 한 달 반의 장기 유럽 여행으로 타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간에 런던 3박 4일을 제외하고선 거의 프랑스 전역을 투어 하는 일정이었다. 



바게트와 샹송으로 이상화된 장밋빛의 프랑스가 아니라, 거칠고 낡고 비가 거의 매일 내리는, 세드릭 클라피쉬의 ‘Paris’에서 잘 나타나는 정돈되지 않은 프랑스가 좋았다. 무심하고 퉁명스러운 엘레강스가 묻어나는 그들의 언어, 헝클어진 머리에 아무렇게나 입은 듯한 청바지가 멋스러운, 유기농 제품을 챙기면서도 담배는 하루에 한 갑씩 피우는 그들의 모순이 어쩐지 멋있었고, 그렇게 어쭙잖게 프랑스어를 배워온지 2년이었다. 영화제 게스트 리스트에서 프랑스 출신임만 보아도 설레었던 나의 프랑스에 대한 애정은, 타국인이라는 신세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던 파리에서의 춥고 외로웠던 2주를 기점으로 끝이 났다. 숙소 예약이 잡혀있어 마지못해 떠났던 액상 프로방스의 산골짜기에서 혼자 매일 와인 한 병을 비우던 새로운 습관의 위험성을 깨닫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원래 일정대로 프랑스 중부 지방으로 가는 대신에 비슷한 기간에 스페인을 여행 중이던 친구를 좇기로 했다. 마드리드를 여행 중이던 그녀를 만날 계획으로 급조된 여행이 비행기 삯이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르셀로나로 갑자기 변경된 것은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나는 지금의 그를 만났다. 


Photography by Michael Fund. All rights reserved.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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