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활여행자 Sep 28. 2016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연애 - 배꼽3

주변에서는 다 하는 흔한 ‘연애’도 못하고 또래 친구들과 만날 때면 ‘솔로’ 생활에 대한 푸념과 자기 한탄만 늘어놓기 바빴던 이십 대 초반, 동아리 선배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인간은 원래 둘이서 한 몸이었는데 누가 찢어놓는 바람에 자기 반 쪽을 평생 찾아 헤맨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흘려들었던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보니 기원은 이러하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416년, 아가톤의 비극경연대회 우승 축하 향연 자리.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한 신화를 소개한다. 인간은 본래 두 사람이 결합된 형태를 뗬다. 팔도, 다리도, 머리도 두 쌍씩 지녔던 인간의 힘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자 이를 경계한 제우스는 불멸의 실로 인간을 두 쪽으로 나눠버렸다. 찢어진 자국을 봉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배꼽. 그리하여 힘을 잃은 인간은 떨어져 나간 반 쪽을 평생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게 되었고, 반 쪽을 만날 때에야 본성을 회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1) 외로운 서울살이로 지친 한 솔로 영혼은 저주에 다름 아닌 이 이야기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오는 것이라 했다. 그의 세계는 참으로 다르고 또 멀어서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우리의 세계에 아찔해질 때가 있고, 우리의 세계는 오고 감에 있어 삐걱거릴 때도 있다. 오랜 장거리 연애는 한 때 잃어버린 반 쪽이라고 믿었던 그를 다시 보지 않아도 괜찮을 법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고, 마음은 멀어져 가지만 의무에 가까운 신념으로 가는 실을 힘껏 붙들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때도 있었다. 


상황에 휩쓸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의 탓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관계의 정점에 이르러 버리지 못한 오랜, 못된 습관을 보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아니 나의 탓이다. 상대에게서 존재의 이유를 그리고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의, 내가 삶에서 결정하지 못한 것들을 ‘우리’에게서 발견하려는 시도의 짐스러움을 나는 이별을 당하고서야 깨달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오랜 시간의 끝에 공기처럼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질 때에, ‘나’를 ‘우리’에서 놓아버리는 습관을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인간이라는 조건을 들어, 그 속성을 핑계로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런 깨달음들이 그냥 어제 먹은 저녁처럼 스쳐 지나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참 비겁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그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화가 났을 때에도 나는 그로 하여금 나의 화를 느끼게 했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이기고 지는 문제로 우리는 많은 말다툼을 해야 했다.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전제를 편안함을 이유로 잊어버리고 나면, 나와 같지 않은 지점에서 분별보다는 감정이 앞섰고 필요치 않은 때에 실망과 화가 생겨났다. 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날들은, 그리고 그가 그에 대해서 고민하도록 돕지 않는 날들은, 함께 잠겨가는지도 모른 채 진흙탕의 한 복판에서 정지해있음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우리는 동시에 고민을 멈춰버리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세계는 깊고 고요하고 맑다. 우박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과 숲의 경계가 사라지는 안개에,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말갛게 색이 짙어지는 초록에 그는 감탄한다. 순수가 관계를 구할 수 있느냐고? 그는 초록에 의지하는 만큼이나 나의 선함이 선천적임을 믿고 있고 우리의 미래를 꿈꾼다. 생채기 난 스스로를 구할 수 없었던 나의 옛 연인이 견디지 못한 내 불완전함의 무게를 지금의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게 지운다. 상처 주기에 바빠 의도하지도 않은 이별 따위를 뱉어버릴 때면 그는 이별을 논하기 전에 상처를 주려는 나 자신을 밝혀내버리고 만다. 그래서 원인도 모른 채 침몰해가는 우리는 더 이상 없다. 우리를 구덩이에 밀어 넣을 불완전함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잃어버린 반 쪽일까? 이 저주 가득한 그리스 신화를 긍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패배가 돼버릴지 모르겠지만, 자기 고집과 자애에 자아 성찰과 자기반성 같은 시도들이 언제나 지고 마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 있긴 하다. 두 사람이 하나로 만났을 때야 비로소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 내가 거울 속에서 가끔 보는 나의 껍데기에서도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머리 속에서만 살고 있는 ‘나’를 관계는 직면케 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나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제우스가 다시 영생의 실로 우리를 묶어놓을 리 만무하니, 서로 붙어 있기 위한 노력은 우리의 몫이니까.


(1)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58854.html



매거진의 이전글 비포 선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