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오늘도 살아있다는 것
초속 1%로 빠르게 닳아가던 국면을 지나, 1%와 100%를 몇 분만에 오가는 기적을 발휘한 후, 한 번 맥없이 꺼지더니 나의 아이폰 선생은 2013년 10월 첫 만남 후 약 3년의 시간을 함께한 끝에 영면에 접어드셨다.
잠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는데, 손에 만질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에 초조해졌다. 초조함은 극도의 수준으로 치달아서,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말 그대로 숨이 막혀왔다. 목구멍보다는 아래에, 아마 폐나 그즈음일 구간에서 무엇인가 탁 막혀있는 듯한 느낌. 답답해서 가슴을 쳐봐도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한 밤의 호흡곤란은,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쓸 데 없는 것들, 메신저, 소셜 미디어, 이메일 따위의 레이아웃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그 시덥잖음을 깨달은 다음에야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가셨다.
노트북을 켠다. 와이파이에 접속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이리저리 접속해보지만 좀처럼 화면은 로딩되지 않는다.
내가 왜 프랑스 생 떼띠엔이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에서, 몇 가지의 살림 가지를 정리해가면서, 세상과 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복도의 발걸음을 죄다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방음이 잘 되지 않는 문과, 건너편 빌딩의 사람들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창문과, 다음 페이지로 옮겨가는데 반나절이 걸리는 초-저속 인터넷만이 가능한 내 노트북의 모니터뿐인 이 손바닥만 한 스튜디오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 앞에 놓여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자면 너무도 길지만, 아무튼 그것은 일어나고 있다.
살아 있음과, 무한한 시간과,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 접속이 되지 않는 인터넷, 어떤 코너에서도 집 안의 모든 면이 보이는 작은 방 안에서 나는 소멸해가는 것만 같았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의외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잠이 들 때 나를 찾는 누군가의 메시지가, 알림이, 메일이 굳이 없다고 할 지라도 그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안을 일으키는 무엇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가상의 세계에 접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때, 한 밤의 호흡곤란과 더불어서 나는 나의 중독을 직면할 수 있었다. 나는 중독되어 있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돕는, 이 방 밖의 사람들과 나의 가짜 접촉에.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으니 난감하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방 안을 하염없이 걷는다던지, 혼자에게 말을 한다던지, 마늘을 깐다던지 이유야 알 수 없는 것들을 했고, 배가 고프기도 전에 때에 맞춰서 입안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준비했다. 소화도 되지 않은 점심이 잔뜩 들어있는 위에 저녁을 밀어 넣기, 냉장고를 그래서 비우기.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아닌 이 허공에 부유하는 이 시간에도 생활의 멀쩡함과 일정함이 나름 그리웠는지 밤이면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다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김승옥의 소설집을 두 번째로 끝냈다.
몇 번이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몇 자 써 내려가곤 했지만 도무지 무엇인가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결국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제목으로 저장하고는 눈 앞에서 치워버렸다. 그리고 또, 너무 부끄러웠다. 같은 말이고 단어임에도, 내가 써 내려가는 것들은 김승옥의 것들에 비하면 먼지이자 풀떼기이자 쓸데없는 잡변에 불과한 것이다. 머리와 마음이 기억하는 것은 김승옥의 손에서 피어난 주옥같은 글이었고 내 손이 열심을 다해도 이 감동은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괴리도 노트북을 덮어버린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모차르트가 아니라고 음악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오늘은 써보자.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지 않으니 나는 어떻게든 살아 있음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살아 있고 숨 쉬고 있는데 이 공간이나 시간은, 그리고 실은 나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했다. 내가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이 잔뜩 도처에 있어 나의 주의를 내 살아있음에서 흩뜨려버릴 기회를 용기 있게 잡지 못하는 나의 찌질함에 대해서.
어려운 가정환경으로,라고 시작하는 정말 지겨워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이 문구를 온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실은 가난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고 지겹고 폭력적이고 애석한 것이다. 돈을 벌어야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큰 이유로,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화를 내고 발길질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외환위기 같은 것으로, 하나씩 마음으로 준비하고 손으로 가꾸던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것은, 부모님이라는 어른도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실패라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모든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을 때도 예쁘게 지켜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연애학에 대한 무수하게 널려있는 책들과 많은 남녀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걱정과 고민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충분한 시간이 드는, 평생 배워나가는 과제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과제를 수행하면서, 처음으로 남편, 아내라는 역할과 더불어 엄마, 아빠라는 역할을 부딪히고 배워나가는 이들에게 자본은 금을 냈다. 점점 메워지지 않을 만큼 깊어가던 금은 마침내 벽을 무너뜨렸고 그 무너진 벽에서는 미움, 증오, 무시, 서로의 탓,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빚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를 팔고, 장성한 두 어른은 다시 각자의 본가로 돌아갔다. 남겨진 우리 자매는 엄마하고 2년, 아빠하고 4년, 엄마하고 3년, 그렇게 한 어른이 만드는 축을 옮겨 다니며 어설프게 성인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회에 돌아가는 하나의 톱니가 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던 아빠는 거의 매일 귀가가 늦었다. 오후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본가로 들어온 아빠와 할머니 간의 미묘한 긴장이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방치됨이라는 집안의 상태에서는 풍겨 나왔다. 모든 음식을 버리지 않고 냉장고 어디엔가 다 넣어두고서는, 냉장고를 정리하거나 청소할 여력도 없는 할머니와 그 냉장고가 함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것을 보고 있기란 고역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면 나와 동생은 코를 막았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작은 냉장고만을 여닫았다. 누구 하나도 나서서 대대적인 청소를 하거나, 할머니의 사용하지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워서 어딘가에 버려질 운명을 가까스로 피한 것들에 대해서 넌지시 정리를 권하거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시골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전처럼 주말이면 마트를 여유 있게 거니는 경제력을 가진 시장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욕망은 우리 모두를 그곳에 정체시켰다. 곧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이 공간은 잠시 통과해가는 곳일 뿐인 것처럼, 마음을 잡고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실패를 어김없이 인정하는 것이라도 되는 마냥, 우리는 죽은 듯이, 잊은 듯이, 매일을 버텼다.
부자가 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세상이 미웠고, 할머니가 미웠다. 할머니가 여든을 넘긴 나이에 꾸준히 밭에 가셔서 이 종류 저 종류의 채소를 가꾸고 돌아오시면, 굽은 허리에 스스로 지탱할 수 없어 주워온 유모차에 몸을 의지하고 고무신을 터덜터덜 끌면서 들어오셔서는 대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에코처럼 울려오는 그 대문 소리를 들어도 나는 굳게 닫힌 방문 밖으로 나가서 인사를 하거나 할머니를 반기는 법이 없었다. 교과서에 코를 박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하던 공부만 계속할 뿐이었다.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예외는 없었다. 학교를 마치면 방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고, 교과서만 노려보던 오후와 저녁이 지나면 그 방의 싸구려 바닥재에 이불을 펴고 눕고, 이 시간의 그리고 이 공간의 나는 사실은 없는 듯이 조용하게, 그 자리에서 문드러질 것처럼, 그렇게 4년을 보냈다.
억지를 부려 지금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경제적 부담을 어른들에게 안기면서 좀 더 큰 도시에서 지내는 엄마를 따라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대학에 가면서 서울로 상경을 했다.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릴 줄 알면서도 이를 실천하기 위한 경제적 비용이라는 이면은 생각하지 않을 만큼만 딱 자란 성인이 되었고, 또 억지를 부려 캐나다로 교환학생을 갔다.
소주 1L짜리를 곁에 두고 매일 조금씩 드셨던 할머니에게 캐나다산 연어로 된 안주거리와 오메가 쓰리를 사다가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참회라도 하듯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한참을 울었다. 스물한 살의 나는 대학에 가고 외국물을 먹은 것만으로도 나의 지독히도 불행했던 과거로부터 보상받은 것 같았고 성공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4년과 나의 불행과 잘 대해드리지 못했던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이런 모든 것들을 씻어버리기 위해서 울었다.
1927년에 태어나셨던 할머니는, 아빠가 열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서 일곱 남매를 키우셨다. 일제 강점기도, 한국 전쟁도 겪으셨던 할머니는, 일곱 남매가 고루 그럭저럭 제 몫을 하면서 사회의 일부가 되어서 그 아들 딸들도 낳는 것을 다 보셨다. 사촌 언니 중에 하나가 눈이 파란 사윗감을 캐나다에서 데려왔을 때 할머니는 그와 악수를 하면서, 이가 없는 얼굴로 웃어 보이시면서 땡큐라고 하셨다.
실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쓸리고 부딪히고 상처받은 피해자들이었다는 것을, 그때 세상에 화를 내고 우리끼리의 연대를 도모를 꾀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이 크지 못했다는 것을, 내일 아침에 눈을 뜨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굴레에 들어와 보니 대학에 갔다는 것이 성공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당신 손으로 가꾼 채소로 일곱 남매를 키운 지난하고 애달픈 인생을 존경한다는 것을, 죄책감을 씻는 대신에 이제는 산다는 것이 허무하고 슬퍼서 그냥 같이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다는 것을 할머니께 말씀드리기는 너무 늦었다. 2012년, 아무런 옷가지 없이 누워 계시는, 숨이 넘어간 때에도 굽혀진 무릎 때문에 어딘가 어설퍼 보였던 할머니를 봤을 때, 눈물이 나지가 않았다. 가서 흔들어서 깨우고,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부르면 다시 일어나실 것만 같아서, 실은 전혀 돌아가신 분 같지가 않아서, 그런 인생을 살고도 공평하게 죽음은 찾아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서. 방으로 돌아오시면 잘 들리지 않는 귀에 티브이 볼륨을 최대로 해놓고, 드라마를 보시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을 만들어서 드시고서는, 술에 취해서 잠드셨던 당신에게 인생이란 무엇이었는지 행복이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물을 수가 없다.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시고 양철로 만들어진 대문이 쿵, 하고 닫히면 모든 문이 닫혀 들어올 틈이 없는 데도 그 둔탁한 소리는 어디론가 새어 들어왔다. 그 소리의 울림에 마음 한편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이런 세상에서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할머니는 밭에 가시고, 나는 숨이 붙어있구나. 방문 밖을 나서고 싶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다.
여기 생 떼띠엔의 오래된 빌딩의 출입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닫힐 때면 그 예외 없던 마음에 울림이 떠오른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에 나는 숨을 죽인다. 문 밖을 나서는 데 아직도 내게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숨을 조여 오는 ‘생’에 대한 직면에 나는, 굳게 닫힌 방문 밖으로 발도 잘 떼지 않았던 10년도 넘은 그때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쯤이면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ps. 어떤 질문보다도, 지금의 그를 할머니께 소개하였다면 할머니가 보여주셨을 표정이 가장 궁금하다. 다시 땡큐라는 인사를 해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