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뷰창
살고 싶은 동네에 이어 살고 싶은 집도 상상해보고 있다. 살고 싶은 집을 떠올려 보는 일은 흰 도화지에 집을 그리는 일과 같다.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하는 모양을 상상할 수 있으며, 혹여 마음이 바뀔 때면 언제든 지워낼 수도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살 집이니 오롯이 내 의견만으로도 충분한 집을 나는 끊임없이 떠올려 보고 있다.
그러한 집을 상상할 때 출발은 항상 작은 원룸이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집의 모습과 닮았다. 주상복합 4층짜리 상가 건물의 꼭대기층 사이드에 있는 방이 나의 방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부동산 계약을 하고, 1년 연장을 통해 3년을 꽉 채워 살았다. 아주 작았지만 나에게는 내 몸을 뉘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그 방에서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창’이었다. 남향이나 동향 등 창이 있는 방향이 아쉽다기보다는 창문의 형태와 전망이 매우 아쉬웠다. 세로가 긴 창문이 두 개 있었는데, 폭도 워낙 좁았고 활짝 열 수 없었다. 창문을 열더라도 창에 달린 방충망은 절대 열 수 없었는데, 그래서 방충망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그래봤자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흐릿하고 지저분했다.
나에게는 원룸의 좁은 공간은 나름 견딜만하게 느껴졌지만, 그 창만큼은 쉬이 견디기 힘들었다. 어딘가 갇혀있는 느낌이 들 때면 잠깐 산책을 나갔다 오기도 했다. 그러다 임시방편으로 마지막에는 화장대 위에 창문 모양의 그림을 놓았다. 그림 안에는 창문의 형태와 그 너머 보이는 초록초록한 뷰가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잠깐이라도 그림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곳이 어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기도 했다.
내가 그릴 집 그림에서 가장 먼저 바뀔 부분은 ‘창’이다. 창은 내가 살아본 집에서 봤던 것들보다 훨씬 큰 통창이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초록초록한 녹색뷰가 눈에 들어온다. 연둣빛부터 짙은 녹색까지 다양한 채도의 색상이 한껏 어우러져 있다. 그 앞에는 편안한 의자를 놓을 것이다. 팔걸이도 있고, 발받침대도 있다. 목까지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의자에 푹 파묻혀 온 몸에 힘을 빼고 나는 창문 너머를 볼 것이다.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녹색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