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을 지나 완연한 여름이 왔다. 나는 이 여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눈에 닿는 모든 것들에서 영원히 자라날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나는 살아 있다고,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존재가 외친다. 이 생명력을 감히 꺼트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강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완전한 상승의 이미지다.
여름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나는 여름형 인간이다. 해가 뜬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넘치는 에너지로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반대로 겨울이 되면 주로 의욕을 잃고 그대로 휴지기에 들어가는데, 이는 겨울잠과 같다. 내년에 다시 올여름을 맞이할 때까지 몸을 움추르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이다.
여름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겨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여름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풍요와 과잉 속에서 자칫 방심하면 일상은 쌓인다기보다는 불태워지기도 한다.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청춘처럼. 나의 일상이 탕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겨울을 떠올린다. 일상 속에서 죽음을 상기하는 메멘토 모리처럼 말이다. 삶은 지속적으로 상승해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겨울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작가 루시아 벌린의 단편집 <청소부 매뉴얼>의 단편 <환상통증>이다. 눈 내리기 몇 달 전, 아버지는 소녀를 데리고 산속 오두막으로 간다. 소녀는 <세토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한 더미 들고 간다. 아버지와 노인은 술을 마시고, 소녀는 강아지와 논다. 그러다 겨울이 오게 되고, 긴 겨울 눈에 갇히면 노인은 벽에 신문을 붙인다. 먹먹한 겨울밤,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모습, 내가 생각하는 겨울의 이미지는 성찰의 시간이다.
그렇게 글자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뜨거운 여름이 올 터이다. 나에게는 여름의 시간이 절실한 만큼, 겨울을 지나오는 시간이 필요하다. 길고 추운 견딜 수 없는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여름의 풍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 겨울을 떠올리며 지금은 여름 속으로 나아가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