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는 주로 책을 읽는다. 근래의 나는 꽤나 길었던 단절의 시간을 지나 활자와 화해하는 데 성공했고, 단조로운 출퇴근길은 다시금 나만의 도서관이 되어주고 있다. 이번 주에 읽고 있는 책은 이주혜 작가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인데, 차주에 있을 독서 모임 때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다. 화자는 일기를 쓰고 있다. 글방에서 낯선 사람들과 모여 앉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적은 일기를 공유한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연결되고, 나는 화자가 떠올린 과거가 화자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궁금해한다.
소란스러운 금요일 밤, 다소 늦은 퇴근길에도 나는 책을 부여잡고 있었다. 화자는 일기 속에서 자신을 시옷이라고 칭한다. 시옷이 잘 서 있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시옷이 어떤 과거를 겪었던 것인지 궁금해하며 활자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 나는 5호선을 탑승한 후 김포공항에서 서해선으로 갈아탄다. 5호선에서 서해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지하 83m까지 하염없이 내려가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그들보다는 활자 속에 존재하는 시옷의 생각과 마음을 궁금해한다.
시옷은 과연 두 발로 서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휘청거리는 어린 시옷이 걱정된다. 걱정되는 마음과 달리 환승을 위해 나의 다리는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인다. 늦은 저녁의 서해선은 듬성듬성 비어있다. 나의 옆자리에는 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앉는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유모차 속 갓난아이를 어르기 위해 앉았다 섰다를 반복한다. 갓난아이를 울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아빠와 달리 아이는 소란스러운 지하철 속에서 마음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이의 고개가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 느끼며 나는 어린 시옷이 볕이 잘 드는 온양집에서 햇살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그늘집으로 이사 갔던 날의 일기를 읽고 있다.
찰칵하고 셔터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졸고 있는 아이를 찍는다. 무심결에 나는 고개를 돌려 셔터 소리에도 깨지 않는 아이의 웃통수와 사진을 찍으면서도 아이의 고개가 꺾이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대주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본다. 분명 좀 전까진 매우 고단해 보였는데,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에는 애정과 행복이 가득하다. 지친 퇴근길, 운 좋게 나는 사랑을 목격했다. 이 아이에게 이 순간을 전해줄 수만 있다면. 사랑이 눈에 확연히 보였던 이 순간에 대해 언젠가 아이에게 증언해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다음 정거장에서 아빠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깨운다. 졸린 아이는 그저 잠투정을 하며 아빠의 품에 안겨 안전히 지하철에서 내린다. 나는 다시 시옷에게 돌아간다. 시옷에게도 이런 사랑으로 충만했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기억에 희미하더라도 분명히. 그 순간을 본 것처럼 상세히 묘사해 어린 시옷에게 전해줄 수만 있다면. 어떤 이야기는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