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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Jun 16. 2016

가방을 잘 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주머니에 지갑 하나만 달랑 찔러 넣고 외출하는 초연한 사람

가방을 잘 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언제나 나는 가벼운 토트백 하나만 들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 왔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에는 기필코, 가볍게 떠나리라 다짐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그럼 가방에 뭘 넣어야 하지? 일단 지갑은 넣어야겠지. 국외 여행이라면 여권도 필수다. 가이드북도 넣어야지. 인도에 갈 때는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인도편》 영어판을 가져갔는데, 너무 두꺼워서 배낭 속에 벽돌이라도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국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노트와 필기도구도 챙겨야 한다. 카메라와 속옷도 챙겨야지. 속옷도 갈아입지 않고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몇 벌이나 챙겨야 할까? 두 벌? 세 벌? 매일 저녁 빨아서 입는다고 해도 두 벌은 여벌로 가져가야 한다. 브래지어도 두 벌 더. 티셔츠는 몇 벌이나 가져가야 하지? 최소한 두 벌. 그런데 왠지 이 티셔츠도 여행지에서 입으면 근사할 것 같다. 그래, 티셔츠는 가볍고 부피도 작으니까. 네 벌 정도 넣자. 없어서 쩔쩔 매는 것보다는 많은 게 나으니까. 


바지는 몇 벌? 이 통바지도 예쁘고, 이 카프리 팬츠는 여행지에서 입기 위해서 산 게 아닌가. 너무 더울지도 모르니까 반바지도 챙기자. 반바지는 가볍고 부피도 작으니까. 


스커트는? 어딘가 근사한 곳에 갈 때는 스커트가 어울리지 않을까? 입고 벗기도 편하고 시원하잖아. 샌들 하나만 신으면 발이 아프니까 운동화도 넣자. 슬리퍼는 넣을까, 말까? 가서 사지 뭐. 아니야. 이전 여행 때 현지에서 슬리퍼를 사려고 했다가 저주에라도 걸린 듯 여행이 끝날 때까지 슬리퍼 가게를 단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잊었느냐. 그냥 가져가자. 


수건도 넣어야 하고, 비상약도 넣어야 하고, 선크림도 넣어야 하고, 화장품도 넣어야 하고, 노트북? 없으면 후회한다. 넣어야지. 그리고 또……. 

이 모든 게 다 들어가는 토트백은 세상에 없다. 

그러고 보면 아주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여행하는 사람은 다음 두 가지 부류이리라. 세상만사에 욕심이 없거나, 정말 부자이거나. 욕심이 없는 사람은 팬티를 매일 갈아입지 않아도 될 거고, 옷을 매일 바꿔 입지 않아도 될 거다. 화장을 안 해도, 일기를 안 써도, 사진을 안 찍어도 되는 사람이겠지. 나는 아니다. 


부자인 사람은 뭐든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아니면 고급 호텔 룸에 비치된 어메니티를 이용하든가. 나도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 지갑과 여권과 휴대폰만 든 가방을 가지고 떠나는 여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좋은 호텔로 가자고 한다. 호텔에 도착해서는 신용카드를 내밀고 여기서 가장 비싸고 가장 좋은 방을 요구한다. 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미니바의 샴페인을 한 잔 마신 뒤에 호텔 아케이드에서 여행지에서 입기 좋은 옷 몇 벌을 산다. 책도 한두 권 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몽땅 런드리백에 넣고 묶은 뒤에 ‘버려 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긴다.  

내게 여행은 늘 가장 싼 항공권을 눈이 빠져라 검색하고, 떠나기 전날 밤까지 짐을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보따리상의 몰골로 떠났다가, 도대체 내가 이걸 왜 다 끌고 왔을까 의아해하다가, 매일 밤 세면대에서 속옷과 티셔츠를 빨아 여기저기 걸어 말리고, 다시 쓰레기 같은 옷과 신발과 장신구들을 잔뜩 사들이고, 입고 온 옷도 마음이 약해 버리지 못한 채 가방에 다시 쑤셔 넣고는 결국 처음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보따리상 같은 몰골로 돌아오는 그런 것이었다. 물욕을 버리지 않는 한, 세련된 여행자의 차림 같은 건 할 수가 없다.


사실은 여행을 떠날 때만이 아니라 외출할 때도 마찬가지다.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 책을 두 권 넣는다. 노트도 넣고 펜도 두 자루나 넣는다. 노트와 펜이 수중에 없으면 불안해지는 성격이다. 그밖에도 가방에는 미처 빼지 못한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다. 지난 영수증, 옷 태그, 마음이 약해 거절하지 못한 피트니스 클럽이나 돼지갈비집 전단지, 바르지도 않는데 불안해서(도대체 뭐가?!) 들고 다니는 립스틱, 과자나 빵 부스러기…….


그래서 나는 작은 가방은 사지 않는다. 무조건 큰 가방을 산다. 기저귀 가방 정도가 딱 좋다. 끈도 튼튼해야 한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 끈이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멋은 부려야 하니까 배낭은 절대 안 매고 다닌다. 그렇지만 납작해야 예쁠 가방에 뭘 잔뜩 쑤셔 넣고 다니니까 결국 멋스럽지도 않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인간을 말해 주는 건지도 모른다. 내 욕심이나 내 불안 같은 것 말이다. 나도 초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주머니에 지갑 하나만 달랑 찔러 넣고 외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나 생각해 봤다. 없다.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지포스가 짊어졌을 돌덩이 같은 짐을 짊어지고 다닌다. 내가 아는 언니는 방석에 양산을 항상 지참했고(그밖에도 정체 모를 물건들로 항상 배낭이 찢어질 것처럼 보였다), 우리 엄마는 가방에 간식을 넣은 보조가방까지 들고 다녔다(보조가방만 해도 쓰러질 무게다). 나 정도면 약과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딸은 집에서 5분 거리 이상만 움직여도 짐부터 꾸린다. 책도 챙기고 인형도 챙기고 간식도 챙기고 노트와 필기도구도 챙긴다. 아들이 다섯 살이었을 때 일이다. 동물원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뭘 잔뜩 쑤셔 넣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방을 열어 보니 며칠 전부터 내가 찾아 헤매던 뒤집개, 신발 한 짝, 테니스공이 들어 있었다. 도대체 왜 들고 왔을까?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일 떠날 3박 4일 동안의 일본 여행에 꾸릴 짐 때문에 걱정이 된다. 마음 같아서는 맨몸에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세면도구, 여권과 지갑과 스마트폰만 챙기고 싶지만, 분명 나는 이민가방에 짐을 꾸릴 것이다. 


내 가방 속에 가득 찬 물건들은 해결하지 못한 내 문제들 같다.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그런 문제들 말이다. 아마 나는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못한 채로 죽게 될 것이다. 죽을 때는 짐을 꾸릴 수 없으니까 그때는 그럴 수 있으려나.


그런데 이제껏 여행을 떠나 정말로 필요한 데 없어서 쩔쩔맸던 물건이 있다면, 그건 바로 머리끈이었다. 그놈의 머리 묶을 고무줄이 없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리조트에서 내내 괴로워해야 했다. 매일 떨어진 머리끈이 없나 바닥만 쳐다보고 다녔다. 리조트의 기념품 가게에서 만 원에 육박하는 머리끈 가격을 보고 눈물을 삼키며 뒤돌아섰다. 결국 샤워캡에 달린 고무줄을 뜯어서 머리끈 대용으로 써야만 했는데, 당시 머리를 묶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했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여행 갈 때는 무조건 고무줄을 세 개 이상 챙긴다. 괜찮다. 고무줄은 가볍고 부피도 적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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