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답잖은 농담으로 마무리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동네에 친구가 생겼다. 나 같은 인생의 총체적 왕따에게 동네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동네 친구를 사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도 동네 친구를 바란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만나는 친구들 말고,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카톡으로 생사를 확인하는 친구들 말고, 아예 얼굴도 모르고 서로 좋은 말밖에 해줄 말이 없는 온라인 친구들 말고, 진짜 동네 친구를 원한다. 우리 집 담벼락 너머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또 창문을 열어 화답을 하고, 구멍가게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쳐 서로의 민낯을 부끄러워하고, “오늘 점심은 우리 집에서!” “오늘 저녁엔 술이나 한 잔!”이라고 외칠 수 있는, 그래도 불편하지 않은 동네 친구를 사귀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낯가림이 심하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고 누굴 사귀는 데 서툰 사람이다. 언제쯤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물어야 할지, 전화번호를 물었으면 언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전화를 걸어서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다시 만난 후에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 다음엔 또 언제 만나야 할지,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연말정산이나 세금 환급 체계만큼이나 이해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 우정의 불발탄이 허공에서 힘없이 추락하는 과정에서 생긴 내 인생의 웃기고 슬픈 에피소드만 모아도 시트콤 한 회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데, 만유인력의 법칙은 나에게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쓸쓸하다.
그런 내게도 친구가 생겼다. 드디어. 학교에서 만난 것도 직장에서 만난 것도 아닌, 그냥 동네에서 오다가다 만난 친구. 우리는 수줍은 탐색전을 거쳐서 1년쯤 지난 후에 문자도 보내고, 밤에 산책도 함께 하고,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낮에 커피를 마시며 수다도 떨고, 휴일에 서울로 놀러 가기도 하는 친구가 되었다. 극장에도 같이 갔고, 쇼핑도 같이 해봤고, 지하철도 같이 타봤고, 캠핑도 같이 갈 예정이다. 정말 신난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여자와 연애라도 하는 사람 같아 마음이 착잡해진다. 사실 우린 둘 다 가정이 있는 여자들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대개 시시껄렁한 것들이다. 나는 누구 못지않게 개드립을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38세, 이렇게 개드립이나 치면서 살고 있을 줄은 예전에는 꿈에도 몰랐다. 난생 처음 간 파리 여행에서도 대학 동창과 개드립 퍼레이드를 벌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웃으며 돌아다니다가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개드립을 치다가도 종종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할지, 세상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나이가 드는 건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도 답도 없는 이야기가 끝도 없는 미궁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시답잖은 농담으로 마무리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동네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봄의 밤을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어둠은 포근하고 뺨에 닿는 공기는 따뜻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식물들이 온 힘을 다해 자라거나 땅 밑의 곤충들이 분주하게 봄의 일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냉담했던 적막함은 사려 깊은 고요함으로 바뀐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에게 호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안다. 봄의 밤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야속할 정도로 춥고 긴 겨울을 지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동네 친구 때문에 설레는 마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