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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04. 2020

보아 비아젱 Boa Viagem

굿바이 리스본

도시에서는 삶이 더 작다.

여기 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내 집보다.

도시에서는 커다란 집들이 열쇠로 전망을 잠가 버린다, 지평선을 가리고, 우리 시선을 전부 하늘 멀리 밀어 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크기를 앗아 가기에, 우리는 작아진다, 우리의 유일한 부는 보는 것이기에, 우리는 가난해진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른 아침부터 바지런하게 짐을 꾸리고 리스본의 언덕 꼭대기, 4일간 정들었던 옥탑방을 나섰다. 닭과 오리와 비둘기가 방목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미난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내려가며 맑고 넓은 하늘을 만끽한다. 어제 베르트랑 서점에서 만난 작가 페소아의 말을 되새기며, 그의 말처럼 내가 누릴 수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의 마지막 사치, 리스본의 하늘을 양 팔 가득 펼쳐 담아본다.

언덕 공원의 닭과 조형물


공항버스를 타러 피게이라 광장까지 걸어 내려오는 가파른 길엔 모든 것에 안녕을 고했다. 낡은 철로를 따라 스르륵 움직이는 노란 트램, ‘깔사다’라고 불리는 리스본만의 특별한 보도블록, 한국 라면을 원활히 수급해 준 아시아 상점들, 매일 몇 번씩 탔던 760번 버스에게도, 햇살에 반짝이는 바이샤 시장과 끼룩끼룩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달콤한 에그타르트의 냄새도 챠우(tchau, 안녕)-


노선표엔 분명 리스본 공항 2 터미널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항버스는 1 터미널까지만 운행했기에 10분 정도를 걸어 2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포르투갈과 유럽 근교 도시를 운항하는 저가항공 전용 터미널로, 키오스크를 통해 셀프체크인과 수화물 위탁을 진행했다. 마치 지하철 첫차 타러 합정역에 내려온 듯한 기분이었는데, 작은 규모의 터미널이고 기계들이 사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빠르게 보안검사대로 진입했다. 가방과 내 몸에 불량한 것들이 없는지 스캔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통수에서 질문이 날아든다.


“이거 모에여?”

“에--? (화들짝 놀라며) 한국말할 줄 아세요?”

“어학당에서 쵸큼 배워써여(어깨 들썩). 이거, 이게 모에여”

“아. 소화제가 뭐더라. (배에 손 얹고) 다이제스…”

“오케이. 소화제여. (엄지 척 들며) 갠차나여.”


리스본 공항 2 터미널 보안 검색대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보며 더욱 자연스러운 발음을 익혔다고 했다. 어쨌든 문제의 ‘그것’은 작은 깡통에 들어있는 분말형태의 소화제였는데,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서 확인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소화제’란 한글과 그 의미를 알아차려준 게 어찌나 고맙던지. 그녀에게  ‘오브리가두(Obrigado), 판타스치쿠(Fantastico)’를 남발했다.


그녀도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보아 비아젱(Boa Viagem, 즐거운 여행하세요)~”

한산한 리스본 공항 제2 터미널


세비야의 버스터미널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리스본. 국경을 차량으로 넘는다는 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스산하고 음산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새벽 5시 무렵 도착해  해가 뜰 무렵까지 버스터미널 플랫폼에서 노숙을 했다.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연락도 되지 않는데(입실일 오전 11시까지 숙소 주소를 안 알려줌)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을 앞두고 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결연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와 호시우 광장으로 향했고, 한줄기 빛처럼 스타벅스 호시우 광장점이 간판 불을 탁! 켜준 덕에 구원을 받았다.


하루는 구시가지로, 하루는 기차 타고 세상의 끝으로, 하루는 산책을 가장한 길 잃은 여행자로 여유롭게 걷고 또 걸었다. 리스본의 언덕길에 적응이 될 즈음 빵도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음에 드는 식당은 연속으로 갔다.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으니까! 혼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면 말 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언어를 쓰진 않지만 여행자들만의 언어, 소통하고 싶어 정성스러운 의욕을 가득 담은 모든 몸짓이 리스본에 있는 사람들과 나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었다. 물리적으론 떠나지만 나는 언제나 리스본에 닿아있다.

귀여운 트램 안녕 - ,


작지만 알찬 2 터미널 면세점에서 포르투갈과 리스본을 기억할 기념품을 몇 개 장만했다. 전통 체리 술 진자(Ginja)는 본품과 알록달록한 샷잔이 포함된 걸 샀다. 서울에 가서 A에게 선물로 줘야지. 이제 슬슬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아볼까?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니 사람도 많아진다. 두 시간 후면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한 달 전만 해도 낯선 도시였던 마드리드가 지금의 내게 ‘돌아갈 곳’이 되었구나. 남은 마드리드의 생활도 하루하루 알차게 즐겨야지. 새로 옮길 숙소 근처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도 가보고, 호스텔의 워킹투어에도 참여해 봐야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들떠있는데 게이트 앞에서 탄식하는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전광판을 보니 마드리드행 비행기가 연착됐단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저가항공!!!


최대한 편한 자세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쉬어야지. 근데 공항이라 와이파이가 빵빵 터져서 그런가? 보이스톡이 걸려온다.


“올라 마담 미쇼~”


A였다.

이 여행이 모두 끝나면 진짜로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


면세점에서 구매한 Ginja 선물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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