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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06. 2020

투우사와 음반사 사이

장소는 장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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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을 LA에서 거주했고 여기가 내 집처럼 느껴지지만,

장소의 덧없음은 때때로 나에게 집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끔 만들기도 한다.

- 킴 고든 (SONIC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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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이상 연착된 비행을 마치자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여행 중 즉흥적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면서 용기는 얻었는데 건강을 잃었다. 론다 협곡에선 발작 두통이, 세비야에선 발목 부상이,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버스에선 매직 아일랜드의 향연! 더군다나 2,3일에 한 번씩 새로운 도시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주변의 위험한 상황들도 피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보다 길어진 즉흥여행으로 챙겨 먹지 못한 약이 있었다는 사실. 아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아아아-


놀랍게도 이제 미쇼씨에게 ‘집’이란 대한민국 서울시 서대문구에 계약한 전셋집이 아니었다. 이사하고 몇일만에 뛰쳐나와 정들지 못한 탓도 있겠으나 한 곳에 고정된 ‘장소’로서의 집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마드리드에서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숙소를 옮겨 다니고 있지 않은가.


6호선 마누엘 베쎄라(Manuel Becerra)역에서 내려 2호선 Ventas(벤타스) 방면으로 5분쯤 쭉 걸어 내려가면 오늘과 내일을 위탁할 집이 나온다. 고된 여정 후엔 여러 사람과 생활하는 호스텔보다는 아무 때나 널브러져 쉴 수 있는 1인 객실이 절실한 법. 그리하여 저렴한 이비스 체인의 라스 벤타스(IBIS Madrid Centro Las Ventas)점을 예약해두었다. 이곳은 마드리드의 투우 경기장 ‘라스 벤타스’ 바로 맞은편이라 주변에 산책할 곳과 대형마트, 먹자골목도 형성되어 있다. 또 하나의 장점은 모든 객실 요금에 조식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


모두가 일제히 향하는 바로 그곳!


근데 지하철 출구 나가기 전부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옆 사람 팔뚝에서 흐르는 땀을 같이 부비며 둥둥 떠밀리듯 출구를 빠져나왔는데 맙소사! 길도 똑같애, 왓더...?? 당황하고 답답한 것이 나만은 아닌 듯 어떤 사람들은 보도를 내려 차도로 맹렬히 질주했다. 나도 내려갈까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목이 타서 슈퍼마켓에 들어가기로 했다. 근데 여기도 사람이 가득! 심지어 물, 콜라, 무알콜 맥주도 없네? 다음 그다음 상점도 마찬가지!! 무정부 사태라도 발발했나? 이젠 겁이 나 말초신경까지 곤두선 미쇼씨. 급 엄마가 보고 싶다 ㅠ


순간 멀리서부터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게 신호라도 되듯 거리의 사람들은 텐션을 쫙 올려 웃고 소리 지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락 페스티벌 10만 관중의 한가운데에 있었어도 이 정도의 함성은 듣지 못했는데, 거의 2002 월드컵 대한민국 4강 진출 신화가 결정된 시청 앞 함성 규모였다.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폭동은 아니겠고 진짜 페스티벌이라도 있나? 사람들이 가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집결하는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적갈색 벽돌로 웅장한 위용을 뽐내고 있는 이 길의 끝 건물, 환호성이 시작되는 곳. 바로 라스 벤타스 투우장(Plaza de Toros de Las Ventas)이었다.


5분이면 도착할 곳을 거의 20분이 걸려 도착했다. 프론트에서 수속을 할 동한 비싸지만 자판기 생수 한 병을 사 대차게 원샷을 하고 룸 카드를 받았다. 침대를 보자마자 신발도 벗지 앉고 풍덩! 다이빙을 했다. 저렴이 호텔이라도 침대는 뛰어드는 맛이지. 긴장이 풀리자 식은땀이 흐른다. 이대로 있으면 몸이 더 쳐질까 봐 파워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후 6시, 애매한 시간이다. 보통 식당들은 9시에나 열고 지금은 대충 씨에스타를 마치고 맥주 정도만 팔고 있을 텐데… 그래도 산책 겸 슬슬 나가보기로 한다. 인파가 너무 많으면 아예 주택가로 들어가 대형마트 까루프에 갈 작정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사람이 하나도 없다. 대신 엄청난 환호성만이 가득할 뿐이다. 스페인에선 투우가 거의 축구랑 맞먹는구나. 그래 페스티벌 맞네. 사실 투우장에 가볼까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피 흘리며 죽어가는 소싸움을 관람하고 싶진 않았기에 참기로 했다. 


Taberna La Tienta의 홍합 통조림과 감자요리


어쨌든 혹시나 하는 맘에 길 건너 바와 레스토랑이 제법 밀집한 지역으로 발을 옮겼다. 야외 좌석에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을 보니 맥주와 와인, 그리고 간단한 타파스가 보이는 게 아닌가?! 이 시간에도 먹을거리를 내주는 걸 보니 시간 제약 없이 장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게 내부에는 마치 한국 호프집 TV에서 프로야구가 방영되듯 맹렬한 투우장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돌진하는 소의 등에 작살(?)을 꽂을 때면 가게 안팎의 사람들의 호쾌한 소리를 질렀고, 건너편 투우장에서도 들려왔다. 나는 ‘Taberna La Tienta’라는 가게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했다. 쾌활해 보이는 뿔테 안경의 글래머 언니가 나를 반겨줬기 때문이다.


“ 우노 띤또 데 베라노, 우노 메히요네스 삐깐떼. 뽀르빠보르. ”

틴토 데 베라노(가벼운 와인 칵테일) 한 잔, 홍합 통조림 매콤한 걸로 하나 주세요.


홍합이 관절에 좋다는 이야긴 유명하다. 비명을 질러대는 두 다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홍합을 시켰다. 스페인 사람들은 다양한 버전의 홍합 통조림을 즐긴다. 슈퍼마켓에 가면 우리네 참치 통조림 진열 코너처럼 홍합과 조개 관련 통조림이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빨간 맛 초록 맛 꺼먼 맛 시큼한 맛 야채와 함께 한 맛 등이 다채롭게 준비되어있다. 생각보다 몹시 배가 고팠는지 미쇼 씨는 홍합을 빠르게 먹어버렸다. 다른 테이블을 챙겨주러 왔다가 내게 들린 점원이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뭐 사실 통조림인데 어쩌고 말고가 있겠냐만 “무이 비엔~”이라고 말하자 점원도 활짝 웃는다. 그리고 빼놓지 않는 말, “알고 마스?(¿Algo más?, 더 필요한 건 없니)?”로 투철한 직원 정신을 뽐낸다. 하지만 나는 벌써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 우노 빠따따스 브라바스, 뽀르빠보르 ”

감자튀김 하나 주세요.


그녀는 내게 엄지를 척 세워준 뒤 오더를 넣었고, 잠시 후 감자튀김과 함께 돌아왔다. 스페인 감자튀김은 대부분 깍둑 썰어 튀긴 뒤 매콤한 맛이 살짝 감도는 미트소스를 뿌려준다. 뜨거울 때 한입 크게 집어 먹었다. 헐, 이곳이 빠따따 맛집일세!! 한 달 좀 넘는 마드리드 생활 동안 무수히 많은 감자튀김 요리를 먹었지만 미트소스와 화이트소스가 적절히 어우러진 여기가 진정한 빠따따스 브라바스 맛집이었다. 내가 진실의 미간을 보이며 즐거워하자 점원도 웃었다. 그리고 간단한 영어로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서 묵는지, 오늘 투우는 안 보러 갔는지 등에 관해 이야길 나눴다.


그날의 경기 (사진 출처 : Las Ventas  홈페이지)


배도 채웠겠다, 해가 지기 전에 장을 보러 가야지. 역전 근처 마트는 투우 시작에 앞서 완전히 털린 상태였으니 투우장 뒤편으로 반 바퀴 돌면 나오는 까르푸에 가자. 오늘내일 마실 물과 값싸고 맛있는 멜론, 즉석에서 짜 먹는 오렌지 주스와 주전부리 몇 가지를 사서 돌아와야지. 


중간중간 뚫린 아치형 벽 사이로 투우장의 모습이 보였다. 관중석의 규모는 3단 이상으로 보였다. 정말 어마어마했고 달려드는 소의 압도적인 위용에도 놀랐다. 농촌에서 보던 황소보다 커 보였다. TV로 생중계되는 투우의 장면에 날렵한 마타도르(Matedor, 투우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모두 다 붉은 천만 쓰는 건 아닌 듯했다. 핑크도 있었다. 그 부분은 좀 놀랍네. 


어쨌든 마타도르는 소와 닳을 듯 말 듯 밀착하며 온 몸을 사용해 천을 휘둘렀다. 현대 무용처럼 보였고, 체조처럼 보였고, 섹시하기 그지없었다. 우람한 뿔을 가진 소가 돌진하며 자신의 등에 꽂힌 작살에서 흐른 붉은 피를 마타도르에게 옮겼다. 몸을 뒤로 피하며 까치발을 든 마타도르의 하복부가 빨갛게 물들었다. 관중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지금 마트에 가는 길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괴성이 울린다. 3런 굿바이 홈런급이다. 아마도 소가 저세상으로 떠난 순간인가보다. 고생 많았다 소야.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마타도르가 하나 있다. 개성 있는 인디펜던트 레코드 레이블 ‘MATADOR(마타도르)’다. 소닉 유스(SONIC YOUTH)와 욜라탱고(YO LA TENGO), 피치카토 파이브(Pizzicato Five), 캣 파워(Cat Power)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최근 내한공연을 가졌던 여성 싱어 송 라이터 스네일 메일(Snail Mail)도 소속된 음반사다. 인디 뮤직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할 수 있게 만든 독보적인 음반사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밴드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파고들다 보면 그들이 소속된 음반사에 집중하게 되고, 그 음반사에서 발매하는 앨범들과 영입한 신인 뮤지션들에게 관심이 생긴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오래 살아남아 전 세계 음악팬들을 매료시켰고, 오로지 음악성과 뮤지션의 정체성을 존중 해 버텨 온 뚝심 있는 음반사가 마타도르다.


킴 고든(좌). 그녀의 솔로 앨범 커버(우).


이들의 로고에서도 투우에 사용되는 깃발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뒤에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역대 첫 솔로 앨범이 발매된다. 65세가 넘었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 소닉 유스를 비롯해 BODY/HEAD라는 밴드로도 쭉 활동해 왔고, 프로듀서로, 영화와 각종 전시회, 심지어 의류 브랜드에서도 킴 고든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 그윽한 눈매. 섹시한 목소리까지 그런지 시대의 대모, 록 아이콘이라 불릴 만하다. 그녀의 새 음반을 스페인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솔 광장에 있는 대형 서점에 한 번 가봐야지.


나의 작은 인디 음반사를 폐업까지 하고 정리여행길에 올랐는데 결국 여행이란 일상의 끝엔 음악이 있다. 골똘한 상상 속에서도 음악이 있다. 드넓은 바다를 마주 해도 음악이 떠오른다. 투우장 앞에서도 음악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결국 나를 나답게 지탱하는 건 음악이었던가. 그래서 지금 듣고 싶은 노래는, 말이 나왔으니까 오랜만에 소닉 유스로 가자.



BGM ㅣ SONIC YOUTH – Kool Thing

https://youtu.be/51nLl8nHnJ8     


p.s 음악에 관심 없더라도 이들의 앨범 [Goo]의 커버가 그려진 티셔츠 정도는 봤을지도.

SONIC YOUTH - [Goo] (1990) 앨범 아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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