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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19. 2020

뭘 좋아할지 몰라 일단 크게 만들었어.

레티로 공원 Parque de El Retiro

한가로이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 피에르 쌍소

"     


히잡을 쓴 두 여인을 숙소에서 맞이하느라 새벽잠을 설쳤다. 덕분에 시커먼 어둠을 뚫고 초콜라떼리아 1902로 달려가 추로, 뽀라, 플로르(꽃 패스츄리), 까페 꼰 레체, 초콜라떼까지 엄청 빵빵하게 먹었다. (방문기는 마드리드 추로스 2탄에서 상세히 기록하겠음) 다 먹고 나니 8시 48분!! 이제 배도 부르고, 해도 떠오르고, 무서울 것도 없다.


마드리드 생활 초기에 당황스러웠던 것 하나가 일출과 일몰 시간이었다. 각자 살면서 몸에 베인 일출과 일몰 감각, 그에 따른 생활 패턴이 있을 텐데 마드리드는 전부 2시간씩 느리다. 초반엔 붐비지 않는 시간에 움직이겠다고 아침 7시에 거리에 나왔다가 겁먹고 돌아간 적도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초가을의 이곳은 아침 8시가 넘어야 해돋이가 시작되고 어둠이 걷힌다. 그리고 밤 9시가 돼서야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람들의 기상시간도 늦고, 저녁식사도 9시에 시작되겠지. 아무튼 일출 전의 중심 관광지 뒷골목은 정말 위험하다. 집시와 부랑자들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청소 공무원들이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기 전까진 늘 큰길로 조심히 다니시길 바란다.

색보정 없는 오후 8시 마드리드의 하늘. 아직 해 지기 전.


튀긴 빵을 배불리 먹어서 속이 불편할 지경이다. 베나치오가 없으니 걸어줘야 소화가 되겠지? 며칠 전 비 때문에 못 갔던 레티로 공원에 갈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다! 솔 광장에서 Calle de Alcalá(까예 데 알깔라) 길을 따라 씨벨레스 광장 방향으로 쭉- 걸어가면 레티로 공원의 정문이 나온다. 가는 길에 있는 ibercaja(이베르까하) 은행 ATM에 들러 현금도 인출했다. 이 곳을 특정해 방문하는 이유는 한인민박 스태프에게 ‘출금 수수료가 없다’는 팁도 받았고, 직접 가보니 ATM이 길거리로 나와 있지 않고 은행 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감이 끝내준다.


자! 드디어 레티로 공원 정문이다. 여러 출입구가 있지만 이 개선문을 품고 있는 곳이 정문이다. ‘Puerta de Alcalá(푸에르타 데 알깔라)’는 1700년대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파리의 개선문보다 앞선 시기라고 한다. 해가 쨍쨍하게 잘 드는 위치라 그런지 꽃이 만개했다. 아치가 5개나 있는, 구조로서도 규모로서도 의미 있는 개선문 중 하나라 보시다시피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 없는 곳이기도 하다.

5개의 아치가 돋보이는 푸에르타 데 알깔라. 분홍 꽃밭 만개하심~


레티로 공원 (El Retiro Park, Parque de El Retiro, 부엔 레티로 공원). 벌써 네 번째 방문이다. 펠리페 2세 왕이 튜더 왕비를 위해 선물한 별궁 정원이었다고 한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크게 만들었나 보다. 125 헥타르도 넘는 규모, 어림잡아 400평에 육박하기에 오늘날 마드리드의 ‘허파’, ‘오아시스’라 불린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 어려운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으며 1만 5천 그루 이상의 나무도 심어져 있는데 그중 1600년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도 있다고 한다. 전쟁을 이겨낸 그 몇 그루가 산책하며 나와 마주쳤을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니까. 


마드릴레뇨들이 휴식을 취하고 쉬고,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며 일상을 지켜나가는 400평 규모의 공원을 하루에 다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틈이 날 때, 천천히 산책하고 싶을 때 의도적으로 레티로 공원을 찾는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동서남북+가운데로 구획을 나눴다. 그리고 지난번 둘러본 곳을 이어서 걷는 방식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오늘은 레티로 공원 중심부에 있는 유리 궁전(=수정궁)과 벨라스케스 궁전을 살펴볼 차례다.

레티로 공원 내 유리 궁전 (수정궁), 개장시간도 사람이 많다.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되던 이 광활한 공원이 시민의 품에 안겨 숨을 쉬고, 쉼을 주게 된 건 186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오늘 찾아가는 유리 궁전은 1887년, 필리핀에서 들여온 아열대 식물들을 전시, 보존하기 위한 온실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돔 형태의 파빌리온 구조를 띄고 있다. 설명을 보니 Cast Iron으로 지지대를 만들었나 본데… 캐스트 아이언. 무쇠솥의 주인공이 아닌가? 기..김치 사..삼겹살 먹고 싶… ㅠ 누가 저 대신 솥뚜껑 삼겹살 좀 드셔주시길. 지금은 식물 대신 관광객이 자리하고 있는 유리 궁전이다. 이쯤 되면 혼자 여행 온 한국 사람들을 잠시나마 마주친다. 주변을 살펴보곤 눈이 마주치면, 쿨내 진동하는 ‘척’하고 폰을 건네며 사진을 부탁한다. 사실은 참 부끄러운 순간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불확실한 걸음 사이에 확실한 내 사진을 남겨보고 싶기도 하다.


이제 1883년, 광물 전시회를 위해 지어졌다는 벨라스케스 궁전으로 간다. 적갈색 벽돌과 푸른 타일들의 조화가 너무나 스페인스럽게 느껴진다. 이 곳은 유료 운영되기도 하니까 외관만 잘 둘러보고 가야지~ 했는데 우왕굳 무료 전시가 있네! 하지만 들어가 깜짝 놀랐다. 바깥의 찬란한 햇살과 극명한 반대, 무채색에 가까운 컬러감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분명히 누구나 공감하지만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이었다. 동양작가, 일본인일 것이 분명한 이 작가는 사회 고발, 자아 충돌, 허무, 고독 등 내면에 고민이 참 많아 보였다. 정신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그래서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시간을 들여 작품과 마주 섰다. 퇴장 전에, 입장할 땐 사람이 많아 확인하지 못했던 작가의 이름과 약력 앞에서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이시다 테츠야 (Tetsuya Ishida). 1973년에 태어나 2005년 기차 사고로 사망했다. 새롭게 만난 그는 이미 이 세상엔 없었다.

이시다 테츠야 작품 중에서 Ⓒ tetsuyaishida.jp


벨라스케스 궁전을 빠져나와 얼마나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리가 후들거려 눈앞의 벤치 아무 데나 앉았다. 감정을 다스려야만 했다. 핸드폰으로 이시다 테츠야를 검색해 본다. 그의 사망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한국에선 많이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것 같고, 일본 사람의 글을 살펴보면 작품에 극명한 호불호가 있는 듯했다. 에잇, 괜히 검색했어!!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 소풍 온 사람들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모여들었다. 각자 준비해 온 샌드위치, 샐러드, 간식과 음료를 가운데 꺼내 두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 살짝 허기를 느꼈다. 어휴, 도망가자.


레티로 공원에선 발걸음에 의도적인 느림을 추구하게 된다. 슬슬 걷고 또 쉰다. 한가롭게 책을 읽기도 하고(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가져왔다), 함께 일했던 밴드,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 혼자 흥얼흥얼 부르기도 한다. 이 드넓은 레티로 공원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인공호수와 나룻배, 유리 궁전과 벨라스케스 궁전을 제외하면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 없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뛰는 사람이 정말 많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달려온 건지 레티로 공원 입구 밖에서 이미 땀에 흠뻑 젖어 뛰어 들어오는 남녀들이 있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답게 웃통을 벗어 재끼고 생수통을 머리에 뿌려대는 사람도 꼭 한 번은 마주친다. 보드를 타는 젊은이들도, 손을 맞잡고 걷는 연인도 있다. 요가 클래스도 열린다. 낮잠도 잔다. 고양이마저 꼬리를 넘실거린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연습을 하는 남녀도 마주쳤다.

기타 치는 남녀, 낮잠 타임, 뱃놀이하는 노부부, 명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무식하게) 큰 공원. 그 한가운데엔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도 않고, 압박에서 벗어나 정신머리를 부여잡으려고 애쓰던 나 대신, 걷는 내가 있을 뿐이다. 걷다가 만난 한 미술가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그 감정에 같이 매몰되진 않으려 한다. 오늘의 나는 열심히 걸었고 내일도 또 걸을 테니까. 마드리드에 와서 오늘이야말로 인생의 시야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다.


얼마나 넓어졌는지 맞은편 식당에서 풍겨오는 커리의 강력한 냄새를 포착했다. 아! 지난번에 발로르(Valor)의 추로스를 먹으러 왔다가 발견한 인도, 태국, 동남아 요리 전문점 골목이구나. 그때 봐 두었던, 구글 평점도 제법 높은 Banyui가 건널목 앞이다. “사와티카~(안녕하세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들어갔지만 어차피 태국 사람이 아니란 건 그들도 바로 눈치를 챈 것 같다. 메뉴판을 건네던 점원이 놀랍게도 한방에 “Are You Korean?”라고 물었다. 그리고 “아니용하시에요” 서툰 발음으로 내 안녕을 확인했다. “코쿤가~(고맙습니다.)” 나도 답했다.


그리고 국물 없인 못 사는 궁물즈, 미쇼 씨 앞에 나온 닭고기 커리와 똠얌꿍. 유럽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다가 목이 컥 막힐 때면 뚫어뻥처럼 태국의 수프 요리로 다스렸다. 코코넛 밀크의 달짝지근한 향과 새콤짭짜롬한 똠양궁, 쌉싸름한 고수는 더 달래서 음미한다.(나는 고수 매니아)  욕심을 부려 두 메뉴나 주문했지만 남으면 포장해 호스텔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되지! 포장, 테이크아웃 요청은 의외로 쉽다. 자, 다 같이 따라 해 보자. “빠라 예바르, 뽀르파보르. (Para llevar , Por favor)”


하지만 미쇼 씨는 그걸 다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스텔까지 다시 걸어갔다고 한다.


Banyui에서 먹은 똠얌 수프와 닭고기 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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