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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단상 25.

- 감정이 소진된 시대, 우리는 모두 '가영'이 되어가는가-

by 여철기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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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다 이루어질지니 - 나무위키>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의 주인공 가영은 '사이코패스'로 설정되어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할머니의 규칙과 자신의 루틴대로만 살아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묘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내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는 인구의 약 1%에 해당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한 형태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처리하는 뇌의 특정 부위가 다르게 작동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혹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우리는, 가영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감정의 교류가 번거롭다. 에너지가 든다. 점심시간, 동료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힘들겠다"라는 말은 하지만,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퇴근 후엔 모든 알림을 끄고 혼자만의 시간에 침잠한다.


이건 사이코패스의 선천적 냉담함이 아니다. 이건 감정 소모가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현대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 노동을 한다. 고객에게, 상사에게, 동료에게, 심지어 SNS 속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적절한 표정을 짓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적절한 공감을 표현해야 한다.

그 결과, 정작 진짜 감정을 느껴야 할 순간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친구의 경사에도, 가족의 아픔에도, 심지어 나 자신의 기쁨과 슬픔에도. 감정의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 우리는 선천적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감정 고갈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 가영은 마지막 소원 이후,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든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할머니의 사랑, 죄책감, 그리고 전생의 기억까지.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감정을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영은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언제 진짜로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감정을 차단한 채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일까? 아니면 가영처럼, 마지막 순간에야 뒤늦게 깨닫게 될까?

오늘 아침,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보았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며 직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퇴근 후 친구의 전화를 받으며, 귀찮다는 생각 대신 '보고 싶었다'는 감정을 먼저 떠올려보았다.

사소하지만, 이것이 내가 '감정적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드라마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온 동네가 싸이코패스인 가영이를 키웠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가영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감정 고갈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다.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감정 노동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누군가의 감정이 고갈되었을 때, 그를 회복시킬 여유는 주지 않는다.

"힘내"라고 말하면서도 쉴 시간은 주지 않는다. "공감한다"고 말하면서도 진짜 들어주지는 않는다.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요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의식적 노력만이 아니다. 서로의 감정 배터리가 바닥났음을 인정하고, 함께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과 문화가 필요하다.

가영을 키운 것이 온 마을이었듯, 감정이 고갈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도 온 사회여야 한다.

당신 옆의 동료가 오늘 조금 무표정해 보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냉정해서가 아니라 감정 배터리가 방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누군가의 감정이 충전될 수 있도록 조금의 여유를 나눠보면 어떨까.

그것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이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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