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혐오와 조롱의 카르텔을 부수는 '페미닌 리더십'과 연대의 힘

by 조하나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와 소셜 미디어 게시물을 열면, 피로감과 함께 짙은 기시감이 밀려온다. 정치권의 거친 막말부터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의 자극적인 방송까지, 세상은 마치 누가 더 지배적이고 폭력적인지 겨루는 거대한 남성들의 경연장 같다. 타인을 짓밟는 무례함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포장하고, 혐오와 조롱을 통해 자신의 서열을 과시하는 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풍경이 너무나 당연해져 이제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 견고한 위계의 세계에서 여성인 내가 동등한 주체로서 무언가를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어김없이 말을 끊고 얄팍한 지식으로 무장한 채 나를 가르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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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은 자신의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이 오만한 태도의 본질을 날카롭게 해부한 바 있다. 한 파티에서 만난 남성이 솔닛 본인이 쓴 책인지도 모른 채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던 웃지 못할 일화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눈앞의 여성이 어떤 지식과 경험, 전문성을 가졌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솔닛의 지적대로 이런 끝없는 '맨스플레인'은 단순한 대화의 악습이나 무례함이 아니다. "여성은 지식이 없는 텅 빈 그릇이며, 남성인 내가 그 안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맹독성 오만이자, 궁극적으로는 공론장에서 여성의 입을 막고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어 발언권 자체를 강탈하는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폭력적인 서열 다툼과 존재의 지우기 속에서, 문득 지인이 던진 서늘한 한마디가 머리를 쳤다.


"여성 의제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야."


정확한 통찰이다.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게이더는 "특권이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구조가 애초에 자신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을 때 기득권은 일상에서 어떠한 마찰력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 앞에는 장애물이 없기에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착각하며,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적하는 약자들의 생존 투쟁을 그저 '유난스러운 불평'이나 '이기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기득권을 분석한 사회학자 페기 매킨토시 역시 이를 '보이지 않는 배낭'에 비유하며, "특권이란,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 굳이 성찰하거나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안도감, 즉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투명한 배낭 안에는 주류 사회가 기본값으로 제공하는 무수한 프리패스와 신뢰가 들어 있지만, 정작 배낭을 멘 당사자는 그것이 특혜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누리는 구조적 이득을 온전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포장하며, 매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해명하거나 입증할 필요가 없는 그 압도적인 편안함을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믿게 된다.


나아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은 "무관심은 권력자의 특권이자 가해자를 돕는 무기"라며 특정 의제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억압의 수단이 됨을 경고했다. 무관심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해도 내 삶의 안전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만한 권력의 확인이다. 동시에 낡은 시스템이 가하는 폭력에 눈을 감음으로써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기존의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보수하는 가장 교활하고 적극적인 동조 행위인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성 의제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야."


이 문장의 '여성'이라는 단어를 장애인, 성소수자, 저소득층, 군인, 노인 등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밤길의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것, 식당 입구의 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누군가의 농담에 내 정체성이 부정당할까 봐 표정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 모든 평온함은 내가 훌륭해서 얻어낸 훈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과 배제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특권의 비가시성'일 뿐이다. 내가 나도 모르는 특권을 얼마나 누리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뼈아픈 자각은,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만든다.


영화 <햄넷>을 연출한 클로이 자오 감독은 최근 헐리우드의 척박한 현실을 꼬집으며 '페미닌 리더십'을 화두로 던졌다. 2025년 미국 흥행 상위 100대 영화 중 여성 감독의 비율은 단 8.1%(9명)로 곤두박질쳤다. 이는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2023년(12.1%)이나 2024년(13.4%)에 간신히 쌓아 올렸던 성취가 무색하게도, 7년 만에 최저치로 추락한 충격적인 결과다. 독립영화제 경쟁 부문의 여성 감독 비율이 60%를 웃도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여성 감독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거대 자본을 쥔 할리우드의 낡은 시스템이 다시 익숙한 '남성 중심의 카르텔'로 퇴행하며 의도적으로 기회의 문을 닫아버렸음을 방증한다.


이토록 견고한 배제의 벽 앞에서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페미닌 리더십은 단지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적 의식을 뜻한다"고 명확히 정의했다. 즉, 그녀가 말하는 리더십은 생물학적 특성이나 단순한 상냥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억누르고 군림하는 '지배'가 아니라, 직관과 관계, 공동체, 그리고 '상호의존성'에서 진짜 힘을 끌어내는 방식이다.


자오 감독은 이 거대하고 유연한 힘이 통제와 위계로만 굴러가는 현재 할리우드의 낡은 시스템, 즉 '우리가 갇혀 있는 기존의 컨테이너'에는 결코 들어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수직적 질서를 거부하고, 생존의 디테일을 살피며 타인과의 '연결'과 '돌봄'을 통해 맥락을 짚어내는 이 근원적인 힘은, 파괴된 세계를 복원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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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올림픽'의 세상을 넘어서는 연대


지금 세상은 '피해자'들만 넘쳐나는 기괴한 시대다. 누구나 자신이 더 아프다며 상처의 크기를 겨루고, 타인의 고통을 지워버리는 방패로 나의 고통을 내세우는 소모적인 '피해자 올림픽'이 매일 곳곳에서 열린다. 이 '피해자 서사'의 범람은 때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이 되어 정당한 비판을 가로막고 공동체의 논의를 '누가 더 불쌍한가'라는 소모적인 감정 싸움으로 퇴행시킨다. 하지만 진짜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권력은 자신의 상처를 훈장처럼 흔들며 연민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세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1994년, 100일 만에 80만 명이 학살당한 르완다의 참극 이후, 살아남은 여성들은 원한과 복수에 매몰되지 않았다. 남성 인구가 급감한 잿더미 위에서 의회의 60% 이상을 차지하게 된 르완다 여성들은 젠더 기반 폭력(GBV) 처벌법과 여성의 토지 상속권 보장법 등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상처를 도려내는 법안들을 통과시키며 공동체를 재건했다. 이는 단순히 '여성 의원 수'의 증가가 아니라 가부장적 폭력이 파괴한 자리에 '돌봄과 법적 정의'라는 새로운 골조를 세운 사건이었다. 피해자의 위치를 거부하고 설계자의 자리에 선 이들은, 여성이 리더가 되었을 때 사회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거대한 실증 데이터이자 필연적 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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