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를 바다로 던져버리자

슬픔의 삼각형을 부수고 나만의 섬으로 향하는 유목민의 탈

by 조하나


요즘 생각은 온통 이 세계의 거대한 '헤게모니'(특정 국가나 계급이 정치·경제·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세상의 상식으로 만드는 지배 권력)에 가 있다.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자본주의, 개인주의, 심지어 아름다움의 기준조차 사실은 특정 승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정해놓은 거대한 룰의 결과물인데, 요즘 들어 그것이 뿌리부터 통째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6년 현재, '백인'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이 견고한 세계의 패권은 인류 역사에서 바뀔 기회가 과연 한 번도 없었을까. 역사학계가 말하는 '대분기'의 시점을 되짚어보면, 서구 중심의 지배가 확립된 것은 생각보다 늦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의 일이다. 콜럼버스의 초라한 산타마리아호가 출항하기 80년 전, 이미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닿았던 명나라 정화의 거대한 보물선 함대가 스스로 바다를 닫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1492년 이후 아메리카 대륙의 1억 원주민들이 구대륙의 질병인 천연두에 무너지지 않는 '미생물학적 주사위'의 행운을 쥐었거나, 15세기 지중해 무역망을 장악한 오스만 제국의 나비효과가 목숨 건 대서양 횡단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날갯짓했다면, 역사의 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영어가 아닌 만다린어, 힌디어, 혹은 케추아어가 전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때 백인 남성이 아닌 다른 인종이 패권을 쥐었다면, 오늘 이 세상의 모습은 달라졌을까. 동양의 거대한 '조공 체제'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거나 만물과의 공존을 믿는 다코타족이나 잉카 제국의 애니미즘 철학이 무한 경쟁과 자원 추출에 쫓기는 극단적 자본주의를 대체했다면 우리는 조금 덜 파괴적인 지구에 살 수 있었을까. 어쩌면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끔찍한 기후 위기는 애초에 도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억압의 척도가 멜라닌 색소나 '백인성'이 아닌 종교적 일치, 기후, 혹은 특정 가문의 혈통 같은 다른 문법으로 바뀌었을 뿐 폭력과 계급이라는 구조 자체가 마법처럼 소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억압받던 자들의 가장 큰 비극은, 억압의 피라미드 자체를 부수기보다는 가해자의 피 묻은 왕관을 빼앗아 쓰고 그 꼭대기에 군림하기를 욕망한다는 데 있다. 억압받던 자가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세상이 저절로 정의로워지지 않는다는 인간 본성의 씁쓸한 현실 앞에서 내 생각은 결국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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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이 영화로 두 번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작정하고 덤벼든 이 날카로운 풍자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그가 사회주의 경제 모델과 높은 세금, 그리고 한때 한국 아이를 가장 많이 입양했던 복지 선진국 스웨덴 출신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좋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떼어가는 완벽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시스템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지독한 위계 본능과 백인 사회의 위선을, 그는 그 누구보다 서늘하게 관찰해 온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눈과 눈 사이, 미간의 주름을 말한다. 돈으로 보톡스를 맞아 팽팽하게 펴야만 하는 부위이자, 자본의 결핍이 남기는 가장 정직한 흔적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욕망이 압축된 패션계 모델들의 이야기로 문을 여는 이 영화는 거침이 없다. ‘발렌시아가 룩’의 오만한 미간과 ‘H&M 룩’의 자본주의적 미소를 오가며 은유 대신 직설적인 펀치를 날린다. 인간의 가치가 단 몇 초의 워킹과 표정만으로 철저하게 등급 매겨지는 오디션장의 풍경은 이 세계가 얼마나 천박한 잣대로 굴러가는지 폭로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패션계라는 공간이 가진 젠더 권력의 역설이다. 여성이 자신의 외모와 매력으로 남성보다 더 높은 경제적 대우를 받고 위계의 상단에 설 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산업계라는 점이다. 남성 모델인 '칼'은 더 잘나가는 인플루언서 여자친구 '야야'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식당 영수증 하나를 두고 핏대를 세운다. 그러나 데이트 비용 논쟁으로 젠더 이슈를 꼬집는 젊은 남녀 모델의 얄팍한 평등의식 이면에는, 결국 임신으로 경력이 단절되고 수입이 끊어지면 가부장적 시스템과 남성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여성의 막연하고도 거대한 불안이 유령처럼 배회한다. 야야가 "너와 만나는 건 일종의 비즈니스"라며 차갑게 선을 긋는 순간조차 사실은 그 알량한 젊음의 유통기한이 끝난 뒤를 대비해야만 하는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망망대해를 부유하는 호화 요트 위에는 계급, 인종, 자본주의가 기괴하게 뒤섞여 있다. 수백억을 주무르는 자본가들은 갑판 위에서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그들 발밑의 선실 아래 깊은 곳에서는 유색인종 노동자들이 톱니바퀴처럼 배를 굴리고 있다. 배가 침몰해 가는 마당에 마르크스를 논하는 미국인 선장과 롤렉스를 자랑하는 러시아 사업가의 염세주의는, 선상 파티를 뒤덮는 토사물과 배설물로 적나라하게 시각화된다. 자신이 팔아치운 수류탄에 맞아 요트가 가라앉는 줄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부유층,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백인 우월주의 뒤에 숨어 천박한 짓을 일삼던 삼각형의 꼭짓점들이 뒤집히는 순간, 계급의 전복은 엄청난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수십만 달러의 시계를 찬 손목으로 구명조끼 하나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지배 계급의 몰락은 잔인하리만치 희극적이다.


하지만 무인도에 고립되어 기존의 권력이 완전히 붕괴한 후, 돈과 명품이 한낱 쓰레기로 전락하고 오직 생존의 감각만이 유일한 화폐가 된 그 원초적인 섬에서 우리는 더 깊은 절망을 마주한다.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잡을 줄 아는 필리핀계 여성 청소 노동자 '애비게일'이 새로운 권력의 꼭짓점이 되지만, 그녀는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들지 않는다. 생존 기술을 무기 삼아 식량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캡틴'이라 부르게 하며, 잘생긴 백인 남성 모델에게 특혜를 주는 대가로 성적 착취를 즐긴다. 가장 밑바닥에서 억압받던 자가 칼자루를 쥐는 순간, 과거의 상처를 치유의 연대로 승화시키는 대신 자신이 당했던 그 끔찍한 위계를 고스란히 복제해 낸 것이다.


가부장제가 가모장제로, 백인 남성의 패권이 아시아 여성의 독재로 치환되었을 뿐이다. 삼각형은 아무리 180도로 뒤집어도 결국엔 또 다른 삼각형일 뿐, 절대 역삼각형으로 멈추지 않는다. 물리학의 중력처럼 언제나 긴 밑변이 아래에, 하나의 꼭짓점이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나에게 묻는다. 런웨이 앞줄, 호화 요트의 갑판, 그리고 무인도의 모닥불 앞. 이 세 곳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배역을 연기하고 있을까. 피억압자가 가해자의 자리를 탐하는 한, 그리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권력욕이 존재하는 한, 이 뼛속 깊은 폭력의 기하학은 결코 평등한 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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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삼각형


스크린 속 무인도의 절망은 현실의 제국주의와 완벽하게 조응한다. 단지 픽션에 불과했던 생존 게임은 2026년 오늘, 세계 최강대국의 심장부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지는 ICE(이민세관단속국)의 야만은 이 억압의 삼각형이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폭력적으로 굴러가는지 보여준다. 미니애폴리스에서 무장한 ICE 요원들은 자폐성 장애를 앓는 여성을 차에서 끌어내 사지를 붙들고 짐승처럼 연행하고, 유색인종 부모를 사냥하기 위해 5살짜리 아이를 미끼로 삼았다. 급기야 미국 시민 2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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