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에 대해 모르는 것들

내 이름은 '하나 초'가 아니라 '조.하.나.'

by 조하나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마음


우리가 무심코 적어 내려가는 주소의 순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거대한 단위에서 출발한다. 국가를 먼저 적고, 시와 도를 거쳐, 동과 번지로 진입한 뒤에야 비로소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의 세부 주소에 도달한다.


반면 서양의 방식은 그 정반대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지점, 즉 번지수와 세부 주소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도시로,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한 테두리로 시야를 넓혀 나간다.


이러한 인식의 역방향은 이름과 날짜를 표기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리는 나를 낳아준 혈통과 가문을 뜻하는 '성(Family name)'을 앞세우고 그 뒤에 개인의 '이름'을 붙이지만, 서양은 개인의 이름을 먼저 내세우고 성을 뒤로 미룬다. 날짜를 쓸 때도 우리는 연, 월, 일의 순서로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서 오늘이라는 점으로 좁혀오지만, 서양은 일, 월, 연의 순서로 오늘이라는 '개별적 하루'에서 출발해 거대한 시간으로 나아간다.


이는 단순한 표기법의 관습이 아니다. 세상을 감각하고 인식하는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명백한 증거다. 동양은 거대한 배경과 맥락(전체) 속에 놓인 부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반면, 서양은 독립된 개체(부분)에서 출발해 외부 환경을 인식한다.


이러한 사고 체계의 차이는 문장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 습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서양의 언어, 특히 영어는 철저하게 '명사' 중심이다. 세상을 수많은 독립된 개체들의 집합으로 보기 때문에, 사물의 이름을 명확히 규정하고 분류하는 것을 중시한다. 반면 한국어는 '동사' 중심이다. 덩그러니 놓인 개체 그 자체보다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관계의 흐름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차를 더 권할 때, 영어는 "More tea?"라며 사물(명사)을 앞세우지만, 우리는 "더 마실래?"라며 행위(동사)를 먼저 묻는다.


또한 서양의 문장에는 행위의 주체인 '나(I)'와 대상인 '너(You)'가 강박적일 만큼 반드시 명시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굳이 나와 너를 구분해 지칭하지 않아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I love you"라는 완벽한 주어와 목적어의 결합이 우리에게 오면 그저 "사랑해"라는 하나의 동사로 충분해진다. 굳이 너와 나의 경계를 칼같이 긋지 않아도,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맥락이라는 거대한 덩어리 안에 뜻이 온전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동서양은 사물을 분류하고 정의하는 기준부터가 다르다. 동서양의 사고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전적인 실험이 있다. 바로 ‘원숭이, 바나나, 판다’ 중 관련 있는 두 가지를 묶어보라는 과제이다. 서양인들이 원숭이와 판다를 '동물'이라는 본질적 범주로 묶을 때, 동양인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먹는다'는 관계와 맥락으로 묶는다. 개별 존재의 속성보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흐름을 먼저 포착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개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배경을 지우는 서양의 '아웃포커싱'적 시야와 달리, 우리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산과 나무, 건물의 조화를 한눈에 담는 '전체 맥락'적 시야를 가졌다. 주인공은 언제나 배경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할 때도 차이는 극명하다. 서양은 모든 행동의 원인을 개인이 가진 내적 특성에서 찾으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둘러싼 외적 상황과 맥락을 먼저 고려한다. 어떤 이가 화를 낼 때 "원래 성격이 불같다"고 단정 짓는 쪽이 서양이라면, "오늘 정말 힘든 일이 있었나 보네"라며 상황적 귀인을 앞세우는 쪽은 우리다.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서도 '나'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외향적이다"라는 형용사적 특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서양인과 달리, 우리는 "누구의 딸이다", "어느 회사의 에디터다"처럼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의 좌표로 자신을 정의한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려면 반드시 내 주변의 ‘우리’가 소환되어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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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을 가진 자가 이름을 짓는다


이러한 차이는 일상어에서 가장 선명하게 폭발한다. 서양인들은 끊임없이 '내(My) 집', '내 나라', '내 가족'이라 말하며 소유격의 경계를 명확히 긋는다. 철저히 '나'라는 주체가 소유권을 쥐고 있는 독립된 대상들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우리 집', '우리나라', '우리 가족'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나 혼자 키우는 반려견조차 '내 강아지'가 아니라 '우리 강아지'라 부른다. 우리에게 집과 가족, 나라는 개인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고 나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거대한 '관계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이웃이든 직장 상사이든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는 상대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좌표에 따라 '선배', '언니', '대리님' 등 수많은 관계적 호칭으로 상대를 세밀하게 위치시킨다. 나라는 개인이 누구인지보다, 우리가 지금 어떤 관계망 속에 놓여 있는지가 세상을 파악하는 핵심 기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바탕과 순서가 이토록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서양 백인 주류 학자들이 내린 결론과 그들의 세계관을 아무런 의심도, 질문도 없이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일상에서 서구의 의복만을 ‘정장(正裝, Formal wear)’—즉, ‘바른 복장’이라 부르며 우리 고유의 옷을 ‘전통 의상’이라는 특수한 카테고리로 밀어내는 명칭의 권력이 그 증거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18~19세기 유럽의 특정 시기 음악만을 ‘클래식(Classic)’이라 부르며 시대를 초월한 전범(典範)의 지위를 부여하지만, 우리 고유의 음악은 ‘국악’이나 ‘전통 음악’이라는 협소한 울타리에 가둔다. 서구인의 시각에서 유럽 음악은 ‘음악 그 자체’이지만, 그 외의 음악은 그저 ‘월드 뮤직’이나 ‘에스닉(Ethnic)’이라는 이국적인 장식품으로 분류될 뿐이다.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이 폭력은 더욱 노골화된다. 서양 의학은 그저 ‘의학’ 혹은 ‘병원’이라는 일반 명사로 불리지만, 수천 년의 지혜가 담긴 우리의 의학은 ‘한의학’이라 부르며 특수화하고, 심지어 서구권에서는 이를 ‘대안 의학(Alternative Medicine)’이라는 보충적 지위로 밀려난다. 서양 의학만이 유일한 ‘표준’이고 나머지는 그 결핍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언어적 폭력이다. 대학 강단에서 배우는 ‘철학’ 또한 대개 서구 철학사만을 의미하며, 공자와 노자의 치열한 논리는 ‘철학’이라는 근사한 이름 대신 ‘동양 사상’ 혹은 ‘윤리’라는 이름으로 격하되곤 한다. 서구의 논리 체계만이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유일한 ‘철학’이고, 동양의 지혜는 도덕적인 훈화 말씀 정도로 치부하는 오만한 시선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서양의 시스템을 ‘무색무취한 기본값(Default)’으로 상정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색깔이 입혀진 특수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들이 정한 분류 체계와 명칭을 세계의 유일한 ‘기본값’으로 수용하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질서를 ‘예외’나 ‘부차적인 것’으로 스스로 격하시켜 왔다. 우리가 무심코 "클래식을 듣는다"거나 "정장을 입는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서구의 기준을 ‘바른 것’으로 승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기준을 가진 자가 이름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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