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앤썸은 홍대 앞 작은 클럽에서 뿜어져 나오던 거칠고 인간적인 숨결이었다. 90년대 후반,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HOT,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 1세대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등장했을 때도 나는 그 거대한 주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다. 물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그들의 노래를 부르고 안무를 따라 하긴 했지만, 내 영혼의 안식처는 늘 비주류의 공간이었다. 서태지처럼 스스로 고민하고,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는, 아이돌이면서도 '진짜 아티스트'의 태도를 견지한 이는 그때도 드물었다.
20대가 되어 홍대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비주류 음악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의 클럽 문화는 말 그대로 가장 깊고 날것의 언더그라운드였다. 하우스, 트랜스, 정통 힙합, 펑크 록 등 음악의 각 세부 장르별로 나뉜 작은 클럽들이 즐비했고, 거기서 디제이들이 전문적으로 그 음악만 틀어주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스트리밍 시대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주로 음반을 샀다.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음반은 해외 P2P를 통해 불법 다운 받아 들으며 새로운 소리에 목 말라 했다. 동시에 문화 권력이 약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제한된 정보와 음악에 접근하고자 하는 욕망을 태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결핍과 균열에 이끌리는 사람이었다. 유행하는 대중가요는 별로 끌리지 않았고,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음악, 그 속에 담긴 아티스트의 외로움이나 절망감,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 같은 것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예쁘거나 잘생기지 않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모습이 아닌, 거칠고 인간답고 개성 있는 모습에 나는 더 깊게 공감했다. 그렇게 내 성향을 발견하는 것은 곧 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어 마치 사고처럼, 그리고 운명처럼 인디 잡지의 음악 전문 기자가 되었다. 음악을 많이, 또 다양하게 듣고 홍대 클럽에서 일했던 경험이 뒤늦게 잡지 기자로 입문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아무런 기자 경력도 없던 나를 뭘 믿고 뽑았냐고 편집장에게 농담 삼아 물었더니,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좋아서, 사랑해서 흡수한 음악들이 네 커리어에 엄청난 자양분이 될 거야."
나는 인터뷰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음악 전문 비평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자신 있었다. '진심'.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쓴 아티스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글을 쓰며 내 마음과 감정,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송라이터들은 음표를 글자처럼 썼다. 그리고 그들이 음악으로 쓴 치열한 문장들은 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 그들을 만나 내가 한 인터뷰는 진정성 깊은 대화에 가까웠다. 나는 주책 맞게 인터뷰에서 내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떻게 인터뷰 상대인 아티스트의 음악을 만났는지, 그 음악이 나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을 전해줬는지 진솔하게 설명한다. 처음엔 자신의 말을 왜곡하고 비틀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이용하지 않을까 의구심으로 가득찼던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들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건넨다. '진심'과 '믿음'이다.
인터뷰를 마친 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인터뷰였다", "그동안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들이었다"라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내 인터뷰의 목적과 사명감을 명확히 세우게 되었다. '팬이나 리스너를 위한 인터뷰가 아닌, 나(인터뷰어)를 위한 인터뷰가 아닌, 오직 아티스트가 만족하는 인터뷰를 해야겠다'라고. 창작자가 하고픈 말을 충분히 들어주는 온전한 통로가 되어야겠다고.
노엘 갤러거, 파올로 누티니, 허츠, THE XX, 트웬티 원 파일럿츠, 패티 스미스, 피닉스, THE 1975, 레이첼 야마가타, 국카스텐, 검정치마, 장기하, 빈지노, 이센스, 김창완, 최백호, 장사익 등 수많은 국내외 뮤지션들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무대 위에서 화려해 보이는 그들 역시 그저 연약하고 가련한 한 사람임을 보았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상처와 삶의 질감이 녹아든 음악은 타인의 영혼에 닿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다.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들은 화려한 무대 조명과 명성, 부에 가려져 '음악'과 '예술', '창작', 그리고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했다. 특히 외국 뮤지션보다 한국 뮤지션들, 특히 인디 뮤지션들보다 아이돌 팝 뮤지션들의 압박은 상당했다.
나는 한국의 아이돌 산업계가 정말 역겹고 싫었다. 그래서 인디 잡지에 있을 때 오히려 매달 최백호, 김창완, 장사익 같은 경험 많고 연륜이 깊은 뮤지션들을 인터뷰하는 코너의 이름을 일부러 '아이돌(Idol)'이라고 붙였다. '우상'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삶을 관통하는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야말로 진짜 '우상(아이돌)'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 묻고 싶었다.
그러다 음악 전문 기자로, '인터뷰를 특별하게 잘 하는 기자'로 점점 명성을 얻으며 대형 상업 패션지로 스카우트됐다. '인디 잡지' 기자로 잡지의 이름과 규모만 보고 인터뷰를 거절하는 매니저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게임판에 뛰어들려면 나 역시 몸집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 생각은 슬프게도 적중했다. 내 이름은 그대로, 명함의 잡지사 이름만 영세 독립 잡지에서 대형 상업 패션지로 바뀌었을 뿐인데 기획사 매니저들은 나에게 넙죽 엎드렸다. 그런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서글펐다.
그러면서 아이돌도 만나게 됐다. 이름도 없고 잡지 판매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즉 잡지의 광고 수익에 도움이 안 되는 인디 뮤지션들 인터뷰를 편집장이 노골적으로 막진 않았지만, 나 역시 눈치껏 인디 뮤지션 인터뷰를 하는 대신 아이돌 인터뷰 한두 팀은 예의상 해야 했다. 아이돌 인터뷰를 하면 잡지 판매량이 확실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만난 아이돌의 현실은 처참했다. 대부분 자신들이 직접 곡을 쓰지 않기 때문에 사실 나는 별로 질문할 게 없었다. "다이어트 어떻게 해요?" "여자친구 있어요?"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해요?" 같은 멍청한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종이 낭비이자 이 세상 나무의 희생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아이돌은 대부분 매니저가 인터뷰할 때도 옆에 앉아 있다. 어떤 질문에는 아이돌이 눈치를 보며 대답을 꺼리고, 매니저가 대신 답하기도 한다. 한번은 여자 아이돌이 인터뷰하다 말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내내 불편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회사에서 다이어트 약을 먹여 부작용으로 속이 부대껴 화장실에서 속을 다 게워낸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나도 고역이었다. 대체 이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짓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진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자신이 직접 곡을 쓰거나 가사를 쓰고, 자신의 슬픔, 기쁨, 공허함, 갈등, 방황 등 여러 가지 감정을 꺼내보며 다른 이의 감정을 건드리고 사유하게 하는 진짜 아티스트였다. 어찌 보면 뮤지션은 그런 면에서 시인이기도 하고 문학가이기도 했다.
진짜 만나서 인터뷰하고 싶은 아티스트들이 점점 줄어갔다. 인디 뮤직 씬에는 훌륭한 뮤지션들이 있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고, 아주 작은 인디 씬 안에서만 왕처럼 군림하다 사라졌다. 내가 사랑했던 음악의 낭만이 자본의 논리 앞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K-팝 산업이라는 거대한 공장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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