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에 취해 우리가 스스로 키워낸 가장 기이한 권위주의
최욱이나 김어준 같은 진행자들이 주도하는 시사 방송은 이제 대안 매체나 뉴스의 보완 영역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사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가장 폭력적인 소음은 화면 너머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확신에 찬 목소리들이다.
우리는 모두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하는 출연자들만 선별해 불러 모으고, 아주 정교하고 배타적으로 자신들만의 의제 설정을 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위 대한민국 ‘진보’를 온전히 대표하는 양 위선을 떤다. 적어도 그런 얄팍한 기만은 이제 멈추었으면 한다.
오랜 시간 활자와 삶의 현장을 통해 깨달은 ‘진보’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보란 ‘보수’와 구분되는 명확한 가치 지향, 즉 평등과 인권, 불공정에 대한 타격, 그리고 무엇보다 벼랑 끝에 내몰린 약자의 삶에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고결한 작업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 특성상, 독재에 맞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세력이 곧 ‘진보’로 통용되어 온 역사적 맥락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방송에서 무슨 말을 떠들든 그것은 민주 국가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일지언정 ‘민주’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절차적 ‘민주’를 철저히 따르고 수호하면서도 그 사회경제적 가치관은 다분히 ‘보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주요 담론의 주제를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사람들의 분노와 환호를 특정 방향으로 촉발하는 과정 그 자체는 너무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권위적이다. 백번 양보하여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민주 진영’이라고 주장한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자처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냉정하게 말해 대한민국에는 아직 제대로 된 ‘진보’가 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확고히 자리조차 잡지 못했다. 수많은 억압과 불평등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진보가 아닌 자들이 진보라는 용어의 주도권을 굳건히 선점하고 있는 이상 진정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변할 새로운 진보는 결코 서지 못한다.
이들의 발언권과 권력이 이토록 심각하게 비대해진 결정적 계기는 단연 12.3 내란 사태였다.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일상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불확실성 속에서 사람들은 복잡한 합리적 분석이나 냉철한 이성보다는 당장 내 무너지는 마음을 안심시켜 줄 맹목적인 확신이 필요했다. 그때 사람들은 복잡한 세상을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재단하며, 듣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주는 김어준, 최욱의 방송에서 종교에 가까운 깊은 위로를 받았다. 당시 방송에 나와 대중의 극심한 불안을 낙관론으로 잠재워주었던 유시민 작가가 ‘신경안정제’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 시민들이 겪었던 절박함과 취약성을 뼈아프게 상징한다.
하지만 그 신경안정제가 가져온 위로의 끝은 기이하고 처참하다. 감정적 양극화가 극에 달한 사회적 지형 속에서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사고를 스스로 거두고 특정 진행자들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마치 교리의 모순을 질문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이비 종교의 맹신도들의 모습까지 보인다. 12.3 내란이라는 국가적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그들의 방송이 시민들을 결집시키고 불안을 달래는 데 분명 긍정적인 작용을 한 부분도 있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알량한 위로의 대가로 시민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견제 받지 않는 거대한 괴물을 우리 손으로 직접 키워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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