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말려죽이는가
2026년에 발표된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은 147개국 중 67위를 기록하며 역대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1인당 GDP나 건강 수명은 세계 최상위권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국민이 느끼는 삶의 질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 좌표 옆에는 2024년 기준 10만 명당 29.1명이라는, 13년 만의 최고치를 경신한 자살률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20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이 지독한 연례 보고서는 우리가 매일 허겁지겁 들이켜는 공기의 비릿한 성분표다.
행복보고서의 세부 지표를 뜯어보면 비극의 원인은 더욱 선명해진다. 한국은 '사회적 지원(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의 유무)'이나 '관용', 그리고 '사회적 공정성' 항목에서 처참하게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우리가 물리적으로는 풍요로울지언정, 심리적으로는 단 한 명의 지지자도 없이 각자도생의 정글에 내던져져 있음을 의미한다. 질식할 것 같은 고농도의 불안이 일상의 모든 틈새를 메우고 있다는 비명 섞인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은 분명 인문학적으로 성숙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경이로운 나라지만, 동시에 그 칼날 같은 완벽주의로 서로를 말려 죽이는 기이한 모순의 공간이기도 하다. 타인의 성취를 기꺼이 환대하기보다 현미경을 들이대며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찾아내 무너뜨려야 비로소 안도하는 이 비뚤어진 허기는 결국 우리 자신까지 갉아먹는 독이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학교와 직장, 사회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불합리한 시스템에 맞서 소심한 저항도 해보았지만, 결국 제 궤도를 이탈해 튕겨 나갔다. 정답이 정해진 사회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서 나만의 문장을 지켜내는 일은 매일이 투쟁이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한국에서 도망쳤다. 누군가 내게 "이게 정답이야"라고 떠밀었다면 보란 듯이 따르지 않았을 나의 반항적 주체성은,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나름의 조율을 거치며 버티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었지만, 끝내 나 자신은 그 경계 밖으로 걸어 나가는 유목민의 길을 택하게 했다. 숨 막히는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내려오는 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오직 나로 살기 위해 감행한 절박한 망명이었다.
현재는 나의 수많은 과거 선택들이 모인 합이다. 10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복잡한 도시의 소음에서 물러나 깊은 숲속 마을의 고요 속에 머물면서도 나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전히 어느 한 곳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이자 '경계인'이다. 낯선 세계에서 부딪히며 낡은 신념들이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통과했기에 이제는 그 어떤 집단적 광기에도 쉽게 동조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방인의 눈으로 다시 마주한 내 조국은 연결될수록 더 외로워지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 뒤에 숨어 예전보다 더 정교하고 가학적인 가시를 세운 채 여전히 날이 바짝 서 있는 애증의 땅이었다.
오래전 건너 들은 미국 대학 강의실의 일화 하나가 우리 사회를 관통한다. 교수가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할 때마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은 정답 여부와 상관없이 제 목소리를 냈지만, 유독 한국 학생 한 명만은 한 달 내내 침묵의 섬처럼 앉아 있었다고 한다. 침묵을 깨고 그가 처음으로 손을 들어 내뱉은 말은 논리적인 반박도, 창의적인 견해도 아닌 칠판에 적힌 교수의 '스펠링 오류' 지적이었다. 3개월 내내 그가 강의실에 남긴 유일한 흔적은 타인의 사소한 오타를 잡아낸 것이 전부였다.
이 씁쓸한 일화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방어기제를 상징한다. 자신의 철학이나 내면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은 벌거벗겨지는 듯한 위험천만한 모험이지만, 타인의 명백한 오류를 잡아내는 것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년기의 입시부터 취업, 부동산 등 생애 주기마다 누군가를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는 '제로섬' 구조 속에 갇혀 자랐다. 정답을 창조하는 교육이 아니라, 누군가 공들여 써 내려간 문장에서 오답을 골라내는 감별사로 길러진 것이다. 현대 사회로 접어들며 '전통적 공동체'는 해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대라는 '집단주의'적 잣대는 여전히 강력하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특정 형태의 가족 구성 등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을 서로에게 강요하고, 이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한 번 실패하거나 궤도에서 이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는 공포, 즉 심리적 안전망의 부재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른바 '한국형 호랑이 부모(Korean Tiger Mom)'의 손에 자랐다. 존재 자체가 아닌, 뛰어난 성과와 무결점의 태도에만 주어지는 '조건부 가치감'을 골수에 새기며 컸다. '너를 위해서'라는 거룩한 명분은 대개 '내가 투사한 욕망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너를 위해서'의 생략형이었다.
부모의 인정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대중문화 예술인과 유명인들을 향해 똑같은 회초리를 휘두른다. 유재석, 김연아, GD, 손흥민, BTS, 블랙핑크 등 소위 '월드 클래스' 인사들에게 한국 사회가 압박하는 '태도 강박'은 대중이 부과한 일종의 성인(聖人) 자격시험이다. 실력만큼이나 무결한 인성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 서슬 퍼런 감시는 사랑을 빙자한 가학이다.
우리는 타인의 성취를 기꺼이 환대할 마음의 근육을 잃어버렸다. 내가 저 높이 올라갈 사다리를 잃었으니, 너라도 내 발밑으로 끌어내려야 비로소 세상이 공평해 보인다는 비뚤어진 안도감이 더 강하다. 남의 불행을 보며 남몰래 짓는 이 고약하고 잔인한 미소를 독일어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부른다. 우리에겐 이미 일상의 공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이 병증은, 끝내 누군가의 결백이 부정당하고 잘나가던 아티스트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목도할 때 비로소 진통제 같은 평온을 선사한다. 우리가 받은 상처가 타인에게 더 깊은 칼날로 되돌아가는 지옥의 순환 구조가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집단 성향은 내 몸과 마음을 갉아 먹었다. 결국, 나는 살고 싶어 서울에서, 한국에서 도망쳤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내면의 소음도 잦아들 것이라 믿으며 망망대해의 해외 외딴섬으로 숨어들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가장 끔찍한 괴물과 마주해야 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누구도 내게 마감을 재촉하지 않고, 누구도 내 실적을 감시하지 않는 평화로운 바다 한가운데서도 나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낙원에서도 나는 기어이 책상을 펴고 앉아 미친 듯이 일하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마치 보이지 않는 교관이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쉬는 시간조차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나를 가두고 쉼 없이 몰아세웠다.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생산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적 기아 상태로, 나는 이를 '열심히 하는 병'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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