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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Apr 19. 2024

클래식의 묵중하고도 날카로운 힘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

*이 글은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국 드라마 <셜록> 시리즈를 즐겼다면, ‘모리아티’를 새롭게 정의한 앤드류 스캇의 팬이 된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저 또한 그중 하나인데요. 1955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심리 스릴러 <재능 있는 리플리>가 8부작 넷플릭스 시리즈로 재탄생하며 앤드류 스캇이 ‘리플리’를 맡았다는 소식에 기대하며 기다렸던 작품입니다.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입니다. 






저는 ‘리플리’ 하면 맷 데이먼이 먼저 생각납니다. 어리숙하고 순수한 얼굴 뒤에 숨겨진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모호한 도덕성을 설득하기 충분했습니다. 또한 ‘리즈’ 시절의 주드 로(그때 정말 인기가 대단했습니다)와 기네스 펠트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 <리플리>(2000)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영화 <리플리>가 개봉한 지 20여 년이 넘어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리플리’로 앤드류 스캇을 고른 건 <쉰들러리스트>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스티브 자일리언이었습니다. <아이리시맨> <더 나이트 오브> 등 무게감 있는 작품을 만들어 온 거장이죠. 스티브 자일리언이 직접 각본, 감독, 제작을 맡은 <리플리 더 시리즈>는 6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로 8편의 에피소드 전편, 흑백 촬영했습니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톰 리플리는 60년대 초 뉴욕을 떠돌아다니는 위조범입니다. 그러다 자신을 착각한 부유한 사업가에게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가서 ‘탕아’ 같은 아들 디키 그린리프를 설득해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죠. 더 이상 잃을 것도, 꿈꾸는 것도 없던 리플리는 이 일을 수락하면서 속임수와 사기, 살인으로 점철된 복잡한 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진짜 나를 지워버리고 싶은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기꾼은 아닙니다. 이익은 거의 뒷전인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입니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말합니다. 리플리는 사람들을 속이는 능력에 스스로 만족할 때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으로 평소엔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하죠. 그는 자신의 뒤를 쫓는 수사관이나 의심하는 친구들에 거짓말을 할 때만 인간다워집니다. 땀을 흘린다거나 짜증을 낸다거나 웃는다거나, 어떤 형태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느릿하지만 정교하고 날카로운 스릴러    
  

스티브 자일리언과 앤드류 스캇의 ‘리플리’는 빠른 전개와 자극적인 화면으로 가득한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너무 느리다’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흑백 촬영, 촬영 구도, 인물의 갈등 구조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를 나타내는 장치를 모두 정반대로 배치하며 <리플리 더 시리즈>는 느릿하지만 정교하고 날카로운, 또 다른 스릴러의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아트라니에서 카라바지오까지: 이탈리아의 음악, 그림, 와인, 그리고 풍경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리플리 더 시리즈>는 1960년대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름다움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2018년 출간된 <네오리얼리즘: 이탈리아의 새로운 이미지(Neorealismo: The New Image in Italy 1932-1960)>에서 이 시리즈의 출발점을 찾았다고 합니다. 아트라니부터 베니스, 로마, 나폴리, 팔레르모 등 이탈리아의 예술과 아름다움, 관능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장소들은 낭만적인 비비드 컬러로 가득한 영화 <리플리>와 대조되어 흑백 영화 속에 밀도 있게 절제되어 녹아있습니다. 또한, <리플리 더 시리즈> 촬영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최고조에 달한 2021년이었기 때문에 관광객 하나 없이 인구 800명이 전부인, 시간이 느리게 가는 아트라니의 모습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리플리 더 시리즈>에선 배경 장소 즉, 공간 역시 화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기를 합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아트라니에서 기하학적으로 정밀한 건축물과 관음증적인 눈빛의 조각상, 시체가 숨겨진 교회가 즐비한 로마로, 리플리가 드러내는 어두움의 명암이 짙어질수록 공간 또한 분위기를 달리합니다. 흑백 영화가 세밀한 공간의 감정마저 드러내는 건 바로 ‘빛의 힘’입니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언제나 빛이 중요하다
      

<리플리 더 시리즈>는 이탈리아의 대표 화가 카라바조에 받은 영향으로 놀라운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리플리 더 시리즈>를 흑백으로 촬영했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반대로 원작 영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차별화된 시리즈를 즐기고, 작품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어 좋았다는 호평도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24년, OTT 포맷으로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 관객을 대상으로, 그리고 수지타산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거대기업 넷플릭스를 대상으로 이 시리즈를 흑백으로 만들자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거장의 힘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멋들어진 결과물로 자신의 고집이 아집이 아님을 증명해 냈기에 더 멋지죠.                


           




악의는 모든 것에 스며들고,
      

<리플리 더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일종의 플래시백으로 시작됩니다. 350년 전 카라바죠가 누군가를 살해한 밤, 피 묻은 손으로 와인을 마시는 카라바조는 리플리와 오버랩되죠. 그리고 시리즈의 피날레는 입체파 시대의 피카소 작품으로 장식됩니다. 큐비즘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부분으로 분해합니다. 파편화된 리플리의 다양한 페르소나가 입체파 그림에 나타나죠.      



          


아름다움의 순간은 결국 독이 된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리플리 더 시리즈>에서 최고의 에피소드는 3편 ‘Sommerso’입니다. 디키와 함께 타고 바다로 나간 보트 위에서 살인을 저지른 리플리는 오히려 보트와 한바탕 우격다짐을 합니다. 마치 보트에 사람의 기운이 있는 것처럼요. 보트는 모든 것의 목격자이기도 하고, 리플리의 살인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응징하려는 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플리는 보란 듯이 빠져나가죠. 이 시리즈 자체도 의인화되어 리플리를 가여운 눈으로 보다, 제재하려 들다, 이내 체념하는 듯 보입니다. 시리즈 초반엔 어설프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 리플리를 우스꽝스러운 ‘스피도’와 ‘페이즐리 샤워가운’을 통해 조롱합니다. 반면 디키의 반지와 손목시계를 통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면서 타고난 취향의 우월감을 표현하죠. 이건 디키가 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전반적인 시리즈 작품에서 하는 겁니다. 이는 리플리에 대한 관객의 심리와 함께 하기도 반대로 가기도 하며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보는 재미를 줍니다.      



<리플리 더 시리즈>에는 이방인,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경멸과 짜증이 가득합니다. 디키와 마지는 부유하지만 예술적 재능은 없습니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그림과 글은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미국인의 허영을 조롱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멸시와 경멸을 자아냅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조롱도 넘쳐납니다. 커피에 얼음을 넣겠냐는 마지의 물음에 어이없어하는 라비니 형사는 ‘Dickie’의 철자를 ‘Deekee’로 적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파파라치 문화를 조명하기도 하죠. 그나 저나 라비니 형사를 연기한 마우리치오 롬바르디는 이 작품으로 벌써부터 에미상에 점쳐질 정도로 정말 멋진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마지와 리플리는 서로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혐오감을 느끼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봅니다. 이처럼 모든 것엔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도덕적 모호함이 존재하지요.      


“여기서 과연 누가 진짜 악일까?” 


<리플리 더 시리즈>는 묻습니다. 


ⓒ 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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