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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l 04. 2024

당신은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경험은 공감으로, 공감은 연대로 이어진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온 감각을 집중해도 희미한 빛조차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 있다. 이 차갑고도 낯선 어둠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보이는 세상’을 잠시 잊어야 한다. 그동안 경험했던 어둠은 빛을 끌어들이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영역이었을 뿐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완벽한 어둠이란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세상이다.     


어둠의 시작, 손에 쥐어진 시각 장애인용 지팡이가 그동안 보았던 것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체 모를 두려움과 초조함이 밀려오며 ‘그냥 포기할까’ 잠시 고민한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 대면한 어둠은 상상 이상의 공포와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보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길을 안내하는 ‘로드 마스터’의 목소리뿐. 당황스러운 마음에 잠시 놓쳤던 청각을 찾으려 애써본다. 심호흡을 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려 노력해 보지만, 한걸음 발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말라 목이 탄다. 혼자 남겨지면 어쩌나, 무리에서 멀어져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 초조함뿐이다. 그렇게 난생처음 들어간 완벽한 어둠 속은 차갑고 두렵기만 하다.  

   

혼자 남겨진 느낌에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얼어버렸을 때, 어디선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부드럽게 손을 잡아 방향을 이끄는 그 체온은 지금까지 ‘눈빛’과 ‘말’로만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안심’을 의미한다. ‘내가 함께 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말이 아닌, 눈이 아닌, 손으로 나누는 또 다른 대화인 것이다. ‘로드 마스터’의 목소리와 손길에만 의지해 아이처럼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시각으로 모든 것을 만났던 세상의 익숙함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고, 희미하게 풍기는 풀 냄새와 손으로 느껴지는 촉촉함이 어우러져 지금 이곳이 숲 속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다른 사람과 부딪혀 당황하고 있을 때, 어느새 나타난 ‘로드 마스터’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손으로 건넨다. 허공을 젓고 있는 손을 잡아 이끌어 이정표 삼아 따라갈 수 있는 벽으로 안내한다. 손에 닿는 벽의 느낌이 얼마나 안심이 되고 반가운지. 보이는 세상에서 쉽게 보고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매 순간마다 그동안의 이기적이고 오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마음이 복받쳐 오른다.     


빠르게 달리는 차들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시끌벅적한 소음은 또 다른 공포로 다가온다. 차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심정은 긴장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신호와 함께 건너는 횡단보도, 빨간불로 바뀐다는 경고음에 마음은 급해지고 방향에 대한 확신도 사라져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만다. 시장에서는 고구마와 감자를 구별하기가 힘들고, 포장지 안의 내용물을 손으로 몇 번이고 만져봐도 쫄면인지 라면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나마 기댈 건 보이던 세상에서 얻은 사전 정보. 하지만 이마저도 없이 태어날 때부터 어둠에서 지내온 선천적 시각 장애인들은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시각은 무의미하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시각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기척이 무엇보다 가장 큰 희망이 된다. 시각이 통제된 상황은 시간의 감각마저 마비시켜 90여분의 관람 시간을 30분도 안 되는 시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로드 마스터’의 얼굴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목소리와 말투, 웃음소리, 손의 느낌들은 마침내 그녀를 보게 한다.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가슴을 울린다.     


‘절대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시각으로 모든 것을 인지하는 데에 익숙한 ‘보이는 사람’들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모든 정의가 무의미해진다. 다수의 합의가 항상 옳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다수가 소수의 입장을 살피지 않고,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탓이다.     

 

‘다시 빛을 볼 수 있다’라는 전제하에 사람들은 기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전시가 끝난 후 긴 복도를 통과해 다시 만나는 세상의 빛은 체험 이전의 빛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이렇게 직접 체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보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저는 여러분보다 다른 감각들이 조금 더 발달된 사람입니다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어둠 속의 대화>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25개국 150개 도시에서 600만 명이 넘는 세계인들이 관람한 체험전이다. 200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어둠 속의 대화>는 이후 3년이 지난 2010년 1월부터 신촌 버티고 타워에서 오픈 런으로 진행되다 현재는 북촌(서울 종로구 북촌로 71)과 동탄(롯데백화점 동탄점 7층)에서 운영되고 있다.    

  

전시의 프로그램이나 테마의 퀄리티에 중점을 두는 외국과 달리 한국 관객들은 전시 내내 자신들을 안내하는 ‘로드 마스터’에게서 무엇보다 큰 의미를 얻는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세상에서 관람객과 ‘로드 마스터’의 입장은 정반대로 뒤바뀐다. ‘로드 마스터’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관람객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은 ‘시각’ 임을 당연하게 믿어왔던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해진 모습을 통해 겸손을 배운다. 그동안 시각을 가졌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편협하고 어리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자신을 깨우치고 돌아보는 것이다.     


<어둠 속의 대화>에서 활동하는 ‘로드 마스터’들은 일산에 위치한 트레이닝 세트장에서 약 3개월간의 트레이닝을 거친다. 철저하게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있는 관람객들을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을 통해 안전하게 안내해야 하기에 전시장 안을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전시장 내의 구조와 동선을 수천 번씩 오가며 연습해야 한다. 더군다나 관람객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살피며 손을 잡아 이끌어야 하기에 앞으로 걷는 경우보다 뒤로 걷는 경우가 더 많다. 공간을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필요한 것은 오직 연습과 반복뿐이다. ‘적외선 안경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들은 관람객의 작은 움직임과 방향, 심지어 표정까지도 세세하게 알아차린다.      


“저는 여러분보다 다른 감각들이 조금 더 발달된 사람입니다.” ‘로드 마스터’의 마지막 고백은 함께 한 관람객들의 마음을 울리고, 보이지 않는 곳이기에 트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들은 시각을 잃은 대신 다른 발달된 감각들을 얻었을 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보이는 것 그 이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는 사람이 어둠 속의 사람을 빛으로 이끌 수 없다


<어둠 속의 대화>의 주관사인 엔비전스 송영희 대표는 “시각 장애인들 중 대부분이 후천적으로 점차 시각을 잃거나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실명한 사람들인데,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도 잘 보이던 것들이 안 보이는 느낌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핸디캡으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전했다. 그는 관람객들이 이 전시를 통해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을 다른 관점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되길 바란다.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체온과 공기, 느낌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다른 이를 만나는 진정한 ‘소통’의 의미 말이다. 그는 <어둠 속의 대화>가 ‘장애’와 ‘동정’으로 관람객들에게 다가서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은 소외 계층이고 약자라는 생각’과 ‘비장애인이 더 우월하다는 입장’ 자체가 오히려 장애인이 만드는 문화나 행사에 대한 편견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평면의 도화지에 표현된 물체의 원근감과 입체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의 눈은 들어오는 빛의 양에 따라 입체감을 인지하고 반응하는데, 미세한 빛조차 경험하지 못한 선천적 시각 장애인은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당연해질 수 없는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영화는 수십만 개의 정지 화면을 움직이는 화면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시각의 한계성을 이용한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보이는 사람들은 지금, 시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본질에 접근하다 보면, ‘보인다’는 것은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보이는 사람이 어둠 속의 사람을 빛으로 이끌 수는 없다. 그저 그들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하며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보이는 사람이 처음 만나는 차갑고 두렵기만 했던 어둠은 그 속에서 만난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 내미는 손의 온기를 통해 조금은 따뜻한, 견딜만한 그것으로 변한다. 어둠은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하지만 때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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