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을 조금 넘게 함께 일을 했던 동료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확정되었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안동에서 자라다 중국으로 입양가게 된 이 친구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부터 동아시아의 관계, 우리 주변의 어려움, 무엇이 문제이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금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하는 조금은 무거울 수 있는 주제들을 ‘secret garden’이라 이름 붙인 봄 풀의 향을 앞에 놓고 조금은 가볍게 논한다. 한참을 대화하다 보니 자꾸 뭘 적고 싶어 졌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 몇 가지를 꼽아라 하면 ‘관계 관리’가 아마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한다. 나와 나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나와 너, 나와 우리, 우리와 너희….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모든 관계의 어려움은 ‘나와 나’의 관계 불균형에서 시작된다. 오롯이 주체적으로 서 있는 나는 그래도 주변에 조금은 덜 상처를 받을 테고 그렇다면 조금은 덜 상처를 낼 테니 말이다.
최근 우리가 해야만 한다는, 그런데 조금은 불편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에 대해 왜 낯설고 어려운 걸까 생각해 본다. 이 시기를 통해 ‘관계의 매너’ 혹은 ‘관계의 균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다가도 마치 분리불안을 겪는 어린아이처럼 어느 무리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가까운 관계가 좋은 걸까, 먼 관계가 좋은 걸까? 시시하지만 적당한 관계가 제일 좋은 거라 누구나 이야기한다. 밀착이 필요할 때와 분리가 필요할 때, 느슨한 연결과 강한 연결을 때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말만큼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좁은 땅덩어리에서 엑셀을 힘껏 밟아가며 성장해 온 우리 사회(갑자기 새마을 운동 50주년이라는 사실이 상기된다.)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얼핏 보면 애착관계로 똘똘 뭉쳐 살아온 것 같은 그 현상이 사실 ‘집착’이라고 하는 불완전 애착관계를 더 강하게 만들어온 게 아닐까. 애정 하는 친구 앞에 내가 서야, 멋진 그들보다 우리가 더 잘해야, 무조건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진짜 남도 아닌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지니 마음은 더 딱딱해지고 날카로워지지 않았을까.
결국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그 목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주의를 비하하며 이기주의로 무장한 우리의 그동안의 삶은 괜찮았던 걸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모두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격리되거나, 의도하여 분리된 생활을 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려있을 수밖에 없는 생활의 현장에서 모두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자꾸 거리를 두어야 한다니 자꾸만 사람이 그립고 어렵게 만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시기가 지나면 불완전 애착에서 벗어나 진짜 관계를 만들어 볼 수 있을까. 형식적인 관계보다 꼭 만나야 할 사람들만 만날 수 있을까. 한 가지 큰 걱정은 진짜 애착관계에 대한 기대보다 그 반대편에 있는 혐오와 배척이라는 무서운 것들이 대 놓고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는 가운데, 집에 돌아간다는 그 친구와 대화하는 중에 조금 더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각자 다른 모습을 가진 우리는 각자의 공간과 서로 간의 적정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붙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하고 삶에 대한 비교 샘플을 바로 옆에서만 찾아오지 않았을까. 각자 다른 모양의 우리들은 때로는 퍼즐처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떨어지기도 하며 그렇게 가치관을 넓히고 밖으로 밖으로 기지개를 켤 수 있으면 좋겠다.
답답한 공간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부대껴가며 근시안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상,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만 나으면 된다는 좁다란 마음, 모두 똑같이 이상해지고 있으면서 나만 아니라고 말하는 비겁함, 죄다 모여 계속 벽을 쌓고 성벽 밖은 틀렸다고 말하면서 그 안에서도 서로 다 틀리다고 말하는 이상한 현상.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의 현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면 참 많이 속상할 것 같다.
다시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각자가 바로 서고 그 각자 다움을 서로 존중하게 되어야 우리들의 관계가 조금 나아질 수 있겠는데. 그래야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그 어렵다는 ‘다양성의 존중’도 가능하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모두 남의 탓 이라며 서로 생채기를 내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물리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강제적 기회인 것이다.
각자가 잘할 일이 있고 모두가 잘할 일이 있다면, 그 모두의 잘할 일은 국가의 R&R일 텐데 우리 각자도 우리 국가도 자존감이 높은 합리적인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시국도 험험한데 저리 파란 하늘에 강풍이 몰아치니 참 야속하기도 하다.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나는 추운 봄날의 점심.